지키는 인생, 크레딧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들의 눈길이 자주 강아지 꽁무니를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유의하여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혹여라도 대소변을 하게 된다면 즉각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다. 예전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는 강아지 용변처리를 못할 경우 삼백불의 벌금이 부과되기도 했다고 한다. 돈 삼백불을 아끼기 위해, 다른 데 정신 팔리지 않고 정해진 규칙을 지키려고 무던 애를 썼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은 지나침을 지나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게 한다. 저들은 세계 최첨단 문명세계의 리더들로서 IT업계와 지식사회의 모든 것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만의 안식일이 되면, 시커먼 옷과 모자와 불편해 보이는 장식들을 달고서 저들 회당을 향해간다.
회당 시설이라는 곳이 저들의 삶의 조건에 비해보면 초라해 보이는 곳이다. 복장이나 모든 것이 답답해 보인다. 그러나 저들은 이날 그곳에 가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목숨을 걸고 지킨다. 절대로 뛰지 않고 걸으며, 자신의 레바이를 최고로 생각하며 저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물론 유대인들이 지키는 것은 그저 전통에 불과한 것이지만 지켜야 한다고 배운 것을 시대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그대로 지키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저들의 삶에 분명한 기준이 있으며, 기준을 지키고 사는 삶을 통해 이 땅에서도 잘되는 복을 누리는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기준도 신념도 없는 자의 삶을 조금만 상상해 보아도 쉽게 답을 얻는다. 아무런 분별도 없고, 삶의 질서가 부재한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런 이들에게는 절대로 좋은 크레딧을 줄 수 없는 것이다. 함께 일을 도모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의 딸과 아들을 주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제 정신을 가지고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뒤죽박죽 코로나 신앙(?)
코로나로 인해 신앙생활이 온통 뒤죽박죽된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삶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예배의 익숙한 습관의 관성 탓에 편리함에 몰두하여 언제나 한결같이 지키고 지켜야 될 귀한 본질을 훼손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그렇게 영적으로 피폐한 토양위에서는 삶의 열매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목숨을 걸고 주일을 지켰지만 지금은 형편과 사정이 우선이 되었다. 주일은 내 날이 아니다. 십의 일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세상 사람들마저도 얼마나 저들에게 좋은 크레딧을 줄 것인가?
그런데 오늘날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가는 것이 강아지 뒷 꽁무니 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시시한 것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에, 근처도 못갈 정도의 하찮은 것이 주님을 예배하는 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준이 분명한 인생
기준이 분명한 인생이 아름답다.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의 삶이 아름답다. 특별히 인생이 흉년의 고통에 직면할 때, 그 기준을 새롭고 찾아보고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모든 성도들의 삶이 흉년만난 자와 방불함을 보게 된다. 성경의 흉년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 심판과 징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집을 떠난 탕자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였을 때,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큰 흉년을 만나게 된다. 그가 맞딱뜨린 흉년은 그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집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만난 것이다. 그가 돼지치는 일을 한 것을 보면 그곳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유대 땅이 아닌 이방인 지역이었음을 알게 한다.
다시 말해 둘째 아들은 단순한 가출이나 독립을 요구하며 집을 떠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던 곳에서,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를 신앙적인 용어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불신앙이며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계시는 곳을 떠나, 하나님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반드시 흉년을 만나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법이시다.
흉년이 오기 전에 가뭄이 있었을 것이다. 가뭄은 하늘 문이 닫히는 것이다. 하늘 문이 닫힌 때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백성들의 불신앙과 타락이 있었음을 본다. 엘리야 때에 3년 6개월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으셨기 때문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때에 이스라엘에 닥친 바알 아세라 우상숭배가 창궐했기 때문이다.
룻기서를 보면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유대 베들레헴을 떠나 흉년을 피해 하나님이 없는 땅,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 먹고살기 위한 이유였지만 실제는 흉년의 때에 그리 멀지도 않는 모압에는 양식이 있는데, 떡집이라고 일컬어지는 베들레헴에는 왜 양식이 없게 되었는가를 생각했어야 했다. 그 이유를 룻기서의 배경이 되는 사사시대라는 시대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사시대는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소견을 따라 삶을 경영하고 살아가던 때였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생활을 경영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소견에 따름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과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바람 앞에서 갈대 같은 삶들을 살았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삶의 기준의 새로운 회복
둘째 아들이 만난 큰 흉년은 그로 하여금 삶의 기준을 새롭게 생각하게 하였다. 흉년의 때를 지나며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며 그 걸음을 다시 돌이키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없던 이방인의 땅에서,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할 수 있는 풍성한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아오게 된 것이다. 흉년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자신을 아버지 앞에서 이제는 품꾼의 하나처럼 여겨달라고 청한다. 회복이다. 아버지에게 바라고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아버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족하겠다는 표현이다.
세상의 고난과 환란을 겪은 후에 정금 같은 믿음을 회복한 성도들의 고백도 동일하다.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예배드릴 수 있고, 교회에 나아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준이 회복될 때 은혜가 임하게 됨을 본다. 우리의 신앙은 늘 하나님 말씀하신 기준 앞으로 나아가야 된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와 예배가 없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방향의 문제이다.
최근 목회자들의 고민스런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코로나가 안정을 찾게 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온라인 예배와 더 나아가 온라인 성찬과 같은 신학적으로 함께 용인되지 않을 일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기준을 옮겨간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온라인 교회의 목회자라는 이들의 모임까지 열렸고, 어느 대형교회에서는 새가족을 소개하면서 온라인 성도의 등록을 환영한다고까지 말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삶의 기준-교회와 예배
교회와 예배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준점이 된다. 기준이 된다는 것은 그 주제에 나의 삶의 방향을 접붙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주장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객관화시켜 나아가는 것을 본다. 예배는 철저하게 주관성으로 가야지 객관성으로 갈 수 없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서 팔짱을 낀 채 아주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은혜를 받고서 자신의 삶의 변화를 도모해야 마땅한 것을 영상, 조명, 행사 콘티를 두고서 호불호를 판단하며 보고 듣는 것이다. 신앙의 유행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본질자체에 대한 반응이 아닌, 보여지는 현상에 대해 판단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심판주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신데, 예배를 드리는 자가 그 심판의 몫까지 같이 행사하는 것이다. 은혜는 판단과 비판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고 그를 더 사랑하며, 그를 사랑함으로 그의 맡기신 사명의 일들 앞에 충성함으로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행위인 것이다.
신앙의 유행화
최근에는 어떤 유행가 가수가 은혜를 받았다고 자신의 간증을 가지고서 여러 부분에 있어서 진리를 왜곡하는 강의를 진행하는 것을 본다. 두 가지를 기억한다. 설교를 들을 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들어야 진리를 제대로 흡수한다는 말이다. 간절함으로 말씀을 들어도 모자랄 것인데 비판의 영이 점유한 그 영혼가운데 말씀이 어떻게 역사할 수 있을까? 결국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팬(?)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을 뿐일 것이다.
두 번째는 교회에 대한 관점이다. 기존의 교회가 아닌, 성경공부 입문과정에 들을 수 있는 개념으로, 오늘날 교회와 예배를 객관화시켜 듣고 보는 사람들에게 결코 선하지 못한 영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유튜브 영상시대에 극한폐단의 일부를 보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저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미혹될 것인가?
혹자는 토요일 한국의 시간에 맞추어 설교를 듣고는 예배를 드렸다고 말한다. 주일 한 번의 예배로 주일을 지켰노라고 말한다. 유대인도 아닌데 토요일에 영상으로 한국교회의 주일설교를 듣고는 주일을 지켰다고 말한다. 영상을 볼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토요일이 아니라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어느 날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로보암처럼 임의로 절기의 날짜를 자신의 편리한 대로 변경함을 통해 과연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메타버스와 온갖 신문명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를 이용하고 사용할 수는 있어도 본질을 훼손할 수 있는 부분은 생명을 다해 진리를 지키는 분별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버지니아의 대형교회가 온라인교회의 논란에서 더 나아가 온라인 성찬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그 대형교회의 모범(?)을 통해 온라인 성찬에 대한 여론을 급격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규모 있는 대형교회를 세우고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듯 한다 할지라도,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으면 무너질 애굽의 건축물처럼 허망한 것 뿐 아니겠는가? 늘 생각해야 할 것이다.
거기서, 시온에서
본질과 현상에 대한 기준과 관점이 분명해야 한다. 특별히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는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와 예배의 문제만큼은 1도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형편과 상황을 이용해서, 근본 자체를 훼손하고 자의적 해석을 통해 본질을 무너뜨리려는 이 시대가운데 깨어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리라”(출25:22a),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134:3b)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사람이 변개할 수 없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3.2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