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상과 삶의 축복(7)

-변화와 회복, 예배와 교회
전남수 목사

자기 기준과 변화

 

종말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점점 더 강력한 이기적 개인주의로 무장하는 것을 본다. 항상 자기 자신이 기준이다. 항상 자기를 기준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반응한다. 이런 관점에서 삶을 대하는 이들은 변화가 어렵고 더딘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자기 기준을 고집하는 삶은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의 영혼과 공동체에 큰 영적손실을 가져온다. 

예를 들면 교회와 예배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가야 하는데, 교회가 자신의 삶에 맞추도록 요구한다. 비즈니스의 환경에 따라 교회가 시간을 조정하기 원하고, 목회자들은 저들의 형편과 사정을 따라 마음이 약해져서 옳고 바른 것을 강하게 요구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괜한 분쟁거리를 만드는 것 같아 피하지만 실은 타협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신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일조차 성경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이런저런 불편한 갈등과 때로는 긴 영적전투를 치러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자기 생각, 자기 기준이 너무 강하면 변화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변화의 기회를 잃게 될 때 자신과 삶에 나타나는 피해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사울 왕을 보면 예배의 잘못을 통해 왕권이 떨어지고 가문이 멸망해감에도 핑계에 급급함을 본다. 부득이했다는 이름으로 회개하지 않는다. 그런 영적 실패는 그의 인생의 실패를 가져왔고 자신만이 아니라 세 아들까지 한날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흔히 영적이라는 이름으로 육신의 문제를 분리시키려하지만 그러나 영적인 실패는 반드시 현재적인 삶에서 눈에 보이는 실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참 변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금고가 털렸을 때, 경찰은 전과자들을 제일 먼저 추적한다. 그만큼 사람의 변화가 쉽지 않음을 세상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노력해서 변화될 수 있을까? 약간은 가능하겠지만 성경은 한마디로 어렵다고 말한다. 

로마서 3장에 의인이 없다고 말씀한다. 의인이 없을뿐더러 그 입의 혀는 독사의 혀와 같고, 발이 얼마나 빠른지 피흘리는 데만 따라 다닌다고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이다. 실제로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자기 입으로 고백하고 간증한 그것조차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준하여 영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삶, 늘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기중심적이며 병적인 자기애(愛)를 가진 인생의 당연한 귀결점이다.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우선의 순서를 가져야 한다. 문학에서 말하는 전지적 관점에서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을 첨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지 말라. 특별히 교회와 관련된 영적인 일들 앞에 깊이는 알지 못하지만 내 의견이 왔다갔다 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은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게 될 따름이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삶을 지탱하는 살길이 되는 것이다. 

 

삶의 변화와 회복, 예배

 

예배가 회복되어야 신앙생활과 인생이 변화되고 회복된다.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배와 삶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예배와 삶은 하나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자의 삶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삶 속의 예배가 살아 있는 그런 진정한 예배자만이 오직 한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예배가 너무 많다는 비판을 한다. 주일낮, 주일오후, 수요예배, 새벽예배, 구역예배, 금요예배 등을 나열한다. 아직도 옛날방식으로 목회하나? 그러나 그런 비판의 시류와 상관없이 예배가 되었던 기도회가 되었던 교회의 공적인 예배나 기도회에 참여하기 위해 성도는 부지런히 모여야 한다. 예배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예배 횟수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교회와 가정, 직장이나 어디서든지 자주 예배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이웃들과의 최고의 섬김과 교제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세상에서도 예배에 승리함으로 복을 받았다. 반면에 예배에 실패함으로 저주를 받은 흔적도 아주 명백하다. 사무엘이 사사가 되었을 때 나라의 영적회복을 위해 백성들을 모으고 미스바에서 하나님께 예배했다. 그때 숙적 블레셋이 침략해왔지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셔서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내용들은 성경에 부지기수이다. 

예배의 실패로 인한 멸망도 정확하게 기록하신다. 레위기 10장에 나답과 아비후는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들이며 본인들도 제사장이었는데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예배에 실패해서 멸망한 것이다. 가인과 사울왕도 예배에 실패해서 망한 사람들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다. 외식하는 저들을 향해, 마음이 빠져버린 신앙과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임을 말씀하셨다. 예배의 실패가 삶의 실패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예배자

 

삶의 문제가 무엇인가? 위기가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삶의 내용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참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살며,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마치 아버지 없는 고아처럼 방황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연못위의 부평초처럼 뿌리 없이 바람과 물결 따라 흘러가는 떠돌이처럼 인생을 사는 것이다. 

떠도는 영혼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는 다시 기초를 확인하고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뿌리를 확인하고 가야된다. 사다리에 오를 때 아무리 급해도 받침이 밑바닥에 잘 붙어있는지를 잘 확인하고 올라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의 삶도 항상 회복을 위한 뿌리 확인부터 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자랄 수 있고 그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기도 하며 맛나는 열매의 향기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뿌리 깊은 곳, 저수지의 근원에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아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와 예배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지 아니하고서 인생이 참된 뿌리의 근원을 확인할 길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연약함을 아신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회복의 장소, 회복의 도구로 교회와 예배를 허락하셨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오라는 것이다. 정한시간 정한 장소,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눈이 머무는 교회를 향해 나아오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최고의 하나님, 최선의 예배

 

예배가 회복되면 다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축복의 원리가 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친히 셋팅해 두신 것이 있다. 바로 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죄를 없이 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케 되어 마침내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지고 좋은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 무엇보다도 죄 많은 인생과 죄 없으신 하나님이 만나는 교제, 예배를 성공해야 한다. 

돈을 많이 들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열심히 공력을 쌓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을 드려도 되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 예배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립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예배가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이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예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것이 예배이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이다. 그리고 천국 갈 때까지, 더 나아가 천국에서도 영원히 할 것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예배의 중요성은 강조에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그리스도인은 잘 몰라서 그렇고,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사람은 타성에 젖어서 예배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흔히 예배를 '은혜 받는 시간'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예배의 결과이지 동기나 목적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정성을 바쳐야 한다. 정성이 없으면 건성으로 드리는 예배 곧 형식적인 예배로 전락하게 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요한복음 말씀처럼 영과 진리의 예배는 시간과 정성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그래서 예배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의 예배를 드림이 최고의 변화와 축복을 맛보는 길이다.

예배가 회복이다. 예배가 축복이다. 예배의 온전함을 위해 교회가 살아야 한다. 교회가 살려면 예배가 살아야 한다. 예배가 살아나고 회복될 때 그 나라와 가정과 교회와 개인의 영혼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3.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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