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상과 삶의 축복(5)

–나라와 민족, 가정과 개인
전남수 목사

자신과 세상을 살리는 통로

 

죄악된 세상에서 인생이 회복될 길이 무엇인가?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앞에, 회개하며 돌이키는 것이다. 소돔 고모라가 왜 멸망했는가? 죄 때문이다. 죄가 많아서 멸망한 것이다. 동성애를 포함한 많은 죄악들이 관영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죄인 된 인생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죄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 죄를 돌이킬만한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의인이 없으므로 회개치 못하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을 볼 수 없으므로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것이다. 

되짚어보면 종말의 시대는 눈을 씻고 찾아도 의인 열사람을 찾을 수 없을 만큼의 악한 시대라는 뜻이다. 이러한 종말을 향해가는 시대 가운데서 내가 살고 가정과 공동체가 함께 사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회개의 진실함을 가지는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영성을 잃지 않으며 주님 앞에서 겸손히 의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회개와 돌이킴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코로나로 성도들의 신앙이 떨어져 나가고 때로는 ‘아 저 사람의 신앙이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의 밑바닥을 보이는 중직자들 앞에서도 그가 살고 내가 살고, 우리가 함께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결국은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먼저 깨달은 자의 회개의 눈물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자식이 선생님 앞에 잡혀왔을 때 부모가 마치 자기 죄인양 무릎을 꿇을 때 자식도 살고 궁극적으로는 부모가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교회를 살리고 세상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예배와 회개의 축복

 

사람은 스스로 장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죄로부터의 온전함, 회개에 대한 인색하지 않음을 장담할 수 있는 자가 없다. 교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잘못 갈 수 있다는 것이고 그릇 행하여 범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범죄했을 지라도 하나님 은혜에 가리움을 받을 길이 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피흘림의 희생을 통해 저들의 죄를 가려주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고 예배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으며 회복의 길을 향해 나아가게 하신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다. 

그러한 회복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해주신 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래서 예배의 성공이 인생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되는 것이다. 살기위해서라도 우리는 예배에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들으며 죄악 된 인생은 새롭게 회복을 맛보게 된다. 예배가운데 설교자를 통해서 듣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때 회개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예배가 되지 않고 회개할 마음이 생기지 못하면 결국은 망할 때까지 그냥 달려가는 것을 본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만 망하면 되는 게 아니라 주변까지도 가정과 가문, 공동체까지도 해치는 것을 본다. 

특히 가정의 영적리더인 가장이 예배의 실패자가 될 때 그 가족 구성원까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본다. 예배의 사람 다윗과 달리 예배에 실패하여 회개치 못했던 사울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 죽게 되었을 때에 그의 죽음의 날에 세 아들이 같은 날 함께 죽음 당했던 것을 본다. 지도자의 타락과 실패는 그 사람 자신의 문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리더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될 수 있음을 본다. 교회의 지도자가 예배에 실패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앞에 몸과 마음을 낮추어야 마땅함에도 이를 놓치게 될 때 교회 공동체도 일순간 분열의 영이 엄습하여 사단의 놀이터가 되는 것을 본다. 

 

참된 예배, 겸손한 회개

 

가인과 아벨을 보라. 가인과 아벨이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 때문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그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가? 창세기 4장을 찾아보면, ‘가인과 그 예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예물은 받았다’(창4:4-5)고 그렇게 말씀하신다. 참된 예배는 제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인자신과 그 제물, 아벨 자신과 그 제물’을 함께 온전히 드리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가인처럼 마음 없는 믿음의 형식만으로는,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제물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이 그 예배를 흠향하실 수 없으시다는 뜻이다. 결국 가인은 예배의 실패자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고 예배에 실패한 후에 가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안색이 변했다’(창4:6)’라고 성경은 증거 한다. 예배 실패자의 결론은 안색이 변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예배에 승리한 사람, 온전한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주시는 주의 음성에 순복함으로 나아간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 즉시 회개의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러나 예배가 실패하고 나면 그 마음이 완고하여져서 하나님의 음성에 순한 마음으로 반응하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한 내적인 반응이 외양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안색이 변하는 것’이다. 

가인의 안색이 변하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네가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이 말씀은 네가 왜 회개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시다.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울처럼 가인도 회개하지 않는다. 회개해야 마땅할 순간에 내 예물이 어떠해서 그렇습니까? 라고 말하듯 안색이 변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삶을 형제를 죽인 인류최초의 살인자로 규정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책망을 하면 회개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면 회복이 될 것인데, 예배를 실패하고 나니 회개할 심령이 되지 못하고 마침내 실패의 길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뢰

 

우리는 이성과 사상을 동원해서라도 마음에 작정하고 작정해야 한다. 그것은 “나는 내 평생에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 것이다”는 다짐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면 받지 않으신 이유가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야단치시면 야단치실 이유가 있음을 믿고, 겸손히 주의 뜻을 구해야 한다.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완전하시고 영원하시고 항상 의로우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먼저 물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지를 못하니 회개하지도 못하고 마침내 형제를 죽인 살인자의 오명을 붙이고 만 것이다. 예배의 실패, 회개의 실패가 너무나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살 길을 스스로 막아버린 것이다.

미국에 있다 보면 한국에서 가끔 전화가 온다. 여러 가지 이유의 신앙상담일 경우가 많다. 태평양 건너에 있으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도 조금은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교회 내에서의 갈등의 문제들, 행정적인 일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 상담을 할 때가 있다. 

어느 날 은퇴 권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속이 상해가지고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내용인즉, 은퇴권사회에서 헌신예배를 드리는데 자기가 사회를 보셨다고 한다. 당신이 사회를 보시는데 사회를 본 다음에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날 목사님 설교가 용서에 대한 것이었는데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용서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하고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목사님이 단 위에서 한마디 하시더라는 것이다. “권사님, 졸지 마세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 하고 웃어버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와 수모를 당했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이 칠십이 넘어가지고 이런 수모를 당하고 이렇게 해도 되느냐고 저에게 전화를 하신 것이다. 

어떻게 상담을 했겠는가? 한참을 있다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다. “권사님, 목사님이 졸았다면 졸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더 속이 상했던 것 같다. “목사님이 졸았다면 졸은 것이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다시 전화가 왔다. 전화가 와서 다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졸았던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제게 집중하라고 영적으로 일깨우시는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그 순간에는 좀 더 목사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맞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딴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깨우시려고 목사님을 통해서 그 말을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할렐루야! 

 

예배의 실패는 대재앙

 

이 분이 저의 모친이신데, 연세가 들어도 할 수 없는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자식이고 어머니가 마흔일곱에 혼자 되셔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제가 잘 알기에 만사에 당연히 어머니 편을 드는 쪽이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 교회와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자식이 아니고 목사로서 어머니의 영혼을 케어(care)할 수밖에 없기에 그 목사님에게서 은혜를 받으셔야 하고 어머니의 예배가 결코 실패할 수 없음을 알기에 그렇게 상담을 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교역자 생활할 때부터 지금까지 액수 변동 없이 작은 용돈을 보내드린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목사라고 턱없이 작은 돈을 보낸다. 그런데 그것 보내는 목적은 딱 한 가지뿐이다. 담임목사님과 한 달에 한번 꼭 식사하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내가 가서 할 일은 사실 없기 때문이다. 그 때 맞춰 갈지도 잘 모르고 어머니 장례위원장은 제가 아니라 그 담임목사님이기 때문이시기에 그렇다. 

더불어 한국을 방문할 때도 꼭 빠지지 않는 효도가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목사님 모시고 식사하는 것이다. 목사님하고 어머니 사이에 막힘이 없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예배가 실패하지 않도록 목사님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듣는 복을 누리시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어머니의 예배가 실패하면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없고, 자식들을 향한 기도가 막히고 끊어지기 때문이다.

조국 대한민국, 우리가 사는 미국 땅, 우리가 섬기는 교회공동체와 사랑하는 성도들, 가족과 자녀손들 모두에게 최고의 축복은 예배가 온전히 흥하게 되는 것임을 믿는다. 예배는 인생과 공동체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회개의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마침내 허물 많고 약점 많은 인생과 그의 공동체를 회복과 축복으로 이끄는 통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davidnjeon@yahoo.com

02.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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