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상과 삶의 축복 3

- 나라와 민족, 가정과 개인
전남수 목사

예배의 회복과 축복 

 

성경은 예배가 회복된 사람들, 예배의 거룩함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으로 가득하다. 예배, 말씀과 기도의 참된 예배자로 주의 성전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았던 대표적인 한 사람이 히스기야 왕이다. 열왕기하 18장 말씀을 보면, 참된 예배자 히스기야가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서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와 복으로 충만했던 사람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는가?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 정말 말씀의 은혜에 미치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는 당시 ‘국보 제1호’ 라고 말할 수 있는 모세의 놋뱀을 ‘느후스단’ 즉, ‘쇳덩어리’일 뿐이라면서 그것을 부수어 버린다. 이유는 한가지다. 백성들이 그것을 우상처럼 받들어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산당을 제거했다. 산당을 제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한국의 서원이나 향교처럼 당시에 정치지도자들의 아지트처럼 여겼던 그런 곳인데, 그것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가만히 두면 조용할 일을 애써 분란 거리를 만든 것이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산당과 하나님의 전을 동시에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세의 놋뱀이 어떤 것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불평 중에 물을 찾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었다는 증거물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생각할 때 이것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 놋뱀을 단번에 해치워버렸다는 것이다. 쇳덩어리로 여겨 한방에 부숴버린 것이다. 아무리 가치가 있고 사람들이 좋아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저 쇳덩어리에 불과한 헛된 것임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성령의 이끌리심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대책 없이 순종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산당을 제거하니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거침없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실행해 버린다. 

 

주의 영광, 믿음의 대책 

 

그렇게 일하고 있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그를 형통하고 평탄하도록 축복했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면 어떤 일이라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대책 없이 감당하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대책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성경은 신자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신자가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일을 저지르며(?) 대책 없이 행할 때 하나님의 손과 발이 급해지시는 것이다. 대책 없이 하나님의 말씀의지하고 나아가는 저들을 말씀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입술의 책임을 다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시고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시고 기적이 필요하면 기적을 주셔서 당신의 언약의 말씀에 스스로 신실함을 지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 인생을 지혜롭게 경영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찾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만 구했을 따름이고, 그 영광을 바라보며 손해보고 포기하는 것을 선택을 했을 따름인데도 결국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가장 복 있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간증을 하게 된다. 히스기야가 이런 사람이다. 하나님 한분을 기쁘시게 함으로,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에 찾고 찾던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였던 것이다.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충성을 감당했던 히스기야는 과연 그럴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히스기야 앞에 왕이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아하스이다. 아하스는 어떤 왕인가? 그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잡아다가 인신 제사를 드릴 만큼 아주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악한 왕 아하스를 쳐서 죽게 하니까, 갑자기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 그가 바로 히스기야였다. 신기한 일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악행을 보면서 자랐을 텐데, 어떻게 그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형통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가 행한 일들은 적절한 말씀의 분별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그의 귓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고 들은 그 말씀들이 삶의 척박한 현실을 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불같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말씀이 그의 귀에 들려진 것인가? 전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악한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늘 당신이 쓰시는 말씀의 종을 예비하시는데, 당시에는 누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종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들의 시대를 말할 때 이사야 선지자의 실재를 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계시의 말씀들이 히스기야의 귓가에 들려졌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아버지가 아들을 인신 제사하는 환경 속에 자랐어도 그의 귓가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음성이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려졌음을 넉넉히 추론할 수 있다. 

듣는 자는 살아난다. 어디서 그런 증거들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는 그 후에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이사야 선지자를 찾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물으며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 부탁을 하는 것을 볼 때,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추론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열왕기하 18장 2절에 보면 그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스가랴의 딸 아비야를 말한다.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으로 사역했던 소선지자 스가랴와 다른 사람이다. 스가랴의 딸이라는 말과 그 이름이 아비야라고 특정해서 말하는 자료들을 찾아보면 그의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의 영향력이 극악무도한 남편으로부터 그 아들 이사야의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현실을 뛰어넘는 말씀의 능력들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 영적인 분별력으로 어려운 개혁적인 일들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씀의 통로만 열려있으면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어떤 면에서 엉터리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을 지라도 좋은 말씀의 선생님이 계시고 어머니가 바르게 말씀을 가르치고 은혜를 끼치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배경 속에서도 히스기야를 아름답게 쓰시는 것을 보게 된다. 한마디로 환경이나 배경을 핑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어떠할지라도, 자식이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주신 말씀을 따라 불같이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해주신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술을 못 끊느냐? 우리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이기 때문에 내 몸에는 피가 아니라 알코올이 흐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못난 인생이 있다.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그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또 부모가 날 뒷받침하지 못해서 내가 인생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무엇이 있으면 되는가? 히스기야처럼 그 귓가에 하나님 말씀이 들려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히스기야 그는 그런 배경 속에서도 오직 한 가지 하나님 말씀을 다 준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주의 성전을 사랑하는 히스기야

 

스기야는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받는 말씀과 은혜의 공급이 계속해서 그에게 끊임없이 주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별히 위기의 순간에 주의 전을 찾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며 성전과 밀접하게 삶의 고난과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은혜와 축복의 일들이 그의 삶에 온전하게 드러난 것을 본다. 그는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실만한 영적자세를 가진 은혜의 사람이다.

특히 앗수르 대군의 침공에 대한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는 성전을 찾았다. 성전에서 저들의 조롱하는 문서를 펼쳐놓고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한다. 위기의 순간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변별할 수 있다. 혹자는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며 자기방어를 한다. 그러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주의 전을 찾는다. 주의 전에서 기도한다. 주의 전에서 문제해결을 시작한다. 

이렇게 히스기야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주님의 교회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교회 쪽으로 엎어질 수 있는 사람, 그는 환경을 핑계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모습이었는가에도 상관없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은혜를 넉넉히 가진 사람이 되고 넉넉한 하나님의 축복권안에 머물며 마침내 승리를 노래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2022 새해도 여전하게

 

새해가 밝아도 코로나, 델타 변이 오미크론 등의 헬라어 알파벳이 회자된다. 감사하게도 오미크론은 계절성 독감수준으로 떨어져 코로나시대를 마감하는 징조가 된다는 좋은 소식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New Normal紁ife, 새로운 삶의 표준을 가지고 대응하고 살아야 할 때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때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코로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고 주변에 방어벽만 쌓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에 불과하다. 겨울에 감기 걸릴까 봐 외부출입을 폐하면 감기로부터는 자유할지 모르나 당장 방안에만 앉아있으면 우울증, 허리통, 공황장애, 부부갈등 등등의 기타 문제들일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조심하는 생활은 필요하겠지만 할 일도 지혜롭게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새해, 전 세계인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쳐줄 것처럼 델파, 오미크론 등등의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확신할 헬라어는 이것 한 가지가 아니겠는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예수님, 처음과 나중 되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만 알면 우리는 새해에도 여전하게 할 일을 하면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운데 나아가고 예배하며 주의 음성을 들으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나아갈 때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상술한 히스기야처럼 아름다운 승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위드 코로나에서 위드 지저스로 나아가며 새해에도 여전히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 ‘여전히 한결같은 삶과 분별력’을 통해 승리하는 소중한 날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davidnjeon@yahoo.com

0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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