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존재, 땅의 축복
교회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최고의 축복이 된다. 주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인생을 죄에서 해방시키며 저들의 살아가는 땅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인류의 모든 실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교회와 예배가 온전할 때 나라와 민족이 살고 가정과 개인의 영혼이 살아나고 최고의 복된 존재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는 나라와 민족은 복이 없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교회와 선교사님들을 핍박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정말 귀한 하나님의 복을 내쳐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 땅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땅이 변하고 좋아지는 하늘의 복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이들을 통해 삶의 변화와 기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회와 더불어 놀라운 기적을 맛본 우리 한국 민족의 삶과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양반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그들은 믿지를 않을 뿐 아니라 외려 많은 배척과 핍박을 드러내었다. 교회를 지으려고 땅을 좀 달라고 하니, 땅도 매매를 하지 않는다. 겨우 사정을 해서 땅을 얻었는데 대부분이 쓸모없는 산꼭대기나 혹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그래서 이런 이유들로 해서 오늘날 한국의 백년이 넘는 교회들이 대부분 높은 지대 위나 혹은 높은 고개 마루 위에 위치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역사 속에서 세워진 교회들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을 깨닫게 한다. 성경 말씀처럼(마5:14-16) 온 세상을 밝히는 십자가의 등대불이 된 것이다.
양반들이 배척했던 그 복음을 처음 믿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양반들은 조상을 섬기는 일로 인해 쉽게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당시에 천민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상놈, 거지, 백정과 소수의 양반계급이 주 성도들 층을 이루게 되었다. 특별히 거지들은 남는게 시간이니 교회생활하기가 얼마나 좋았겠는가? 일정하게 출근할 일도 없고 선교사님들의 베푸는 의료와 여려가지 혜택들을 받으면서 열심히 교회를 왔다 갔다 했던 것이다.
차별 없는 복음의 축복
그러던 중에 초기조선 복음화과정 중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왔다 갔다 하던 거지 중에서 믿음 좋은 거지가 생겨난 것이다. 열심히 교회를 출입하면서 말씀을 듣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의 믿음이 쓱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 거지가 일을 마치고서 집에 돌아와 누웠는데 대체 잠이 오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물론 집이라고 해봤자 다리 밑에 가마니를 깔고 덮어 놓은 것이 전부였을 터인데, 하늘 위 다리 밑을 쳐다보는 데 잠이 오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지붕처럼 여기는 다리 밑 천정위로, 자식들 얼굴이 하나 둘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못나고 못나서, 이런 거지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만 자기 자식 놈들도 자기처럼 똑같이 깡통 들고 남의 집 돌아다니며 거지노릇 할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거지가 뭘 했느냐? 그동안 들은 말씀이 있었기에, 마음에 염려거리가 생기면 기도하라는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회를 향해 기도하러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고는 교회에서 이모저모 기도를 하는데, 또 말씀 중에 들은 것이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간절한 기도일수록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그 말씀이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막 부르짖으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외치며 부르짖던 기도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선교사님을 깨우게 하셨는지, 놀라서 달려온 선교사님이 거지에게 묻는다.
“당신 무슨 일이냐?” 그때에 그 거지는 자기의 삶을 아주 진지하게 눈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은 운명처럼 그렇게 거지같은 인생을 살고 가는데, 자식 놈들도 자기처럼 거지로 살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조선 교회를 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말을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의 메시지로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그 거지, 상놈, 백정들의 자녀들 가운데 안식년에 미국을 방문할 때 직접 데리고 가서 저들에게 신학교와 유수의 명문학교 공부를 시켜서 자신들의 선교지와 학교 등을 물려받아 사역하도록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장로교신학교가 프린스턴이었으니 이곳 동부의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졸업하도록 배려를 해서는 한국에 세운 미션스쿨의 교수와 목사로 봉사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가만히 살펴보면 믿음의 한 5-6대를 지나는 가문들을 보면 그들 중에 양반들이 별로 없는 것을 보게 된다. 양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고 가난한 중에서 오직 예수, 오직 주님의 교회를 바라보고 살았던 많은 이들 가운데, 이러한 연유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국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주님 말씀이 그대로(고전1:27) 성취가 된 것이다.
거룩한 신분, 하나님의 교회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인 교회인 승동교회 같은 경우에도 곤당골이라는 백정골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생겨난 경우이다. 그곳에 양반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갈라졌다가 다시 화합하고 했던 그런 내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교회는 상전과 노예가 차별이 없는 새롭고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복음 안에 거지 백정 상놈 양반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거지같은 인생을 살아도 교회를 바라보고 나아가서 교회의 예배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증거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천히 여김을 받던 거지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니 거룩한 거지가 되었고,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던 상놈이 예수를 믿으니 거룩한 상놈이 되었으며,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던 백정이 참된 교회의 예배자가 되니 마침내 거룩한 백정으로 변화가 되더라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주시는 엄청난 변화의 능력이다.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사랑, 헌신의 축복
평안도 정주 땅에 백사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원래 점을 봐주던 그런 남자 무당이었는데 지나가는 선교사님의 전도를 받았다고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평생 그렇게 하고 살 것이냐, 사람답게 사는 길이 있어요. 예수를 믿어보시오. 자식 망하는 길을 버리고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예수를 믿어보라는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던 중에 마침내 그는 무당생활을 청산하고 교회를 나가면서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이 사람이 밭에 일을 하러 가던 중에 선교사님이 교회를 짓고 있더라는 것이다. 흙으로 벽돌을 구워서 교회를 짓고 있는데 저렇게 짓다가는 비가 내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마음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 마음이 감동이 되어 그는 자기에게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땅을 팔아 교회를 지으라고 몽땅 헌금으로 바쳐버렸다고 한다. 선교사님이 볼 때 참 걱정이 되었다. 이제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이 그렇게 조금 있는 땅마저 팔고 나면 나중에 뭘 해서 먹고 살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대답인즉 소작도 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이 그의 믿음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걱정이 되었던지, 선교사님은 이 백사겸의 가정을 데려다가 교회 사찰 집사를 시키게 된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니, 주님께서 아예 교회에 들어와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찰 집사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선교사님이 보기에 그 아들이 참 똘똘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이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한국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이분이 누군가 하면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이 합쳐져 연세 대학교가 될 때 초대 총장이 된 백낙준 박사이다. 하나님 앞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섬기고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그 가문을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의 교회를 섬기고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삶과 가정과 가문을 복되게 인도하심을 드러내는 아주 명백한 증거가 된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들을 책임져 주시고 복에 복을 더해 주시는 것이다.
기복신앙, 만복의 근원
그런데 이런 교회 섬김으로 인한 축복을 말할 때 기복적이라는 말로서 이를 폄훼하는 분들이 많다. 저들은 쉽게 말한다. “복을 받기 위해 교회를 섬깁니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다. 강단에서 복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자기의가 발동하는 분들이 있는데, 기복신앙을 강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영육 간에 그 삶에 은혜가 없는 것을 보게 된다. 인터넷 지식의 짜깁기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은혜를 제한시켜 버리고 스스로의 영혼을 너무나 가난하게 만드는 것을 본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섬기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좋은 복을 구하고 받는다는 것이 어떻게 기복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기복신앙이 무엇인가? 기복(祈福)이라는 것은, 인생 스스로가 자신의 욕심에 근거하여 원하는 복을 정해두고서 이를 얻기 위하여 세상의 피조물 대상에게 엎드려 빌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종교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의 마음에 그 복이 만족되지 못하면 언제라도 그 섬김의 대상을 바꿔치기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대상을 섬기는 종교행위를 일컫는 것이다.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복(萬福)의 근원이시다. 이 말은 복이 만(萬)가지가 있다는 게 아니라 모든 천지만물, 하늘과 땅과 온 우주의 모든 복을 다 가지신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뜻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한량없이 연약한 인생이 만복의 근원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배하며 무엇보다 아들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에 자신의 삶을 드려 헌신할 때에는 반드시 그 삶을 축복해 주신다. 이러한 믿음과 확신이 어떻게 기복신앙이라는 세상적인 이름으로 매도될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우리 민족, 우리 조국, 우리 교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이민의 땅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한다. 그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예배와 교회 중심의 삶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할렐루야.
davidnjeon@yahoo.com
12.0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