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둔한 세상, 주의 주되심(Lordship)

- 성도의 자랑, 추구, 사명
전남수 목사

인생의 아둔함

 

이슬람 시아파의 아슈라 축제를 보면 인생의 아둔함이 느껴진다. 아슈라는 680년 수니파에 항거하다 전사한 시아파 종교지도자 이맘 후세인과 전사들을 기리는 종교행사인데. 시아파 무슬림들은 아슈라 축제 때 칼이나 채찍, 손으로 이마와 등을 때리거나 상처를 내면서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한다. 등짝과 얼굴과 벗은 몸에 자해를 하는 것이다. 온통 피로 몸이 흥건해질 때 까지 그렇게 자신의 몸에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가 창궐할 때에 힌두교도들 안에서도 그런 아둔함으로 보게 되었다. 저들의 우상인 소의 인분을 온 몸에 바르고 소의 젖으로 샤워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저들의 믿음인즉 자신들의 우상인 소가 코로나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고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그와 같이 온 몸에 소의 똥을 바르는 것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아둔한 사람들이라고 하면 혹자는 남의 종교를 폄하하지 말라고 할런지 모른다. 오늘날 시대가 추구하는 사상성이 워낙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강조이다 보니 그런 생각, 그런 말도 나올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의 신앙이 상대적이고 그저 타 종교와의 비교우위적인 차원의 문제이던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저들 종교보다 뭔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낫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주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다른 신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념 속에서 그것을 믿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에티켓을 가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신앙으로 인정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신앙의 영역에서 바라보는 선교의 대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인정일 따름이다. 

 

악한 영, 귀신, 우상

 

우상이 무엇인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며 조각품에 불과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우상의 뺨을 때린다 한들 그 우상덩어리가 벌떡 일어나 맞상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전혀 그럴 리가 없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왜 우상을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 절하면서, 귀신에 붙들린 것과 같은 정상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상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거나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를 가진 악한 영, 사단 마귀, 귀신의 영이 그 사람 안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며 경배하는 순간, 처음 창조된 인생의 목적과는 빗나간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예배하고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지만 이를 방해하며 미혹하는 악한 영, 귀신이나 사단 마귀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지는 영적 세력이 그 우상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그 영혼에 스며들고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상자체가 신비한 효능을 통해 직접 그 경배자에게 살아 역사하는 존재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영적지배, 다스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경배할 때 이를 호시탐탐 노리는 귀신이 ‘옳거니’하면서 그가 숭배하는 우상이라는 대상을 타고 악한 영들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칠을 한 송아지의 형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 송아지는 그저 쇠붙이에 불과하고 금도금을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경배받기 원하는 귀신이 거기에 들어가 앉아 하나님이 받을 경배를 대신 받으며 그 사람의 영혼을 영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금송아지 자체가 그럴 능력이 있음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소나 형상 앞에 무릎 꿇고 부복할 때, 그 악한 영의 세력에 의해 경배자의 영혼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우상덩어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돈도 마찬가지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하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돈이라고 한다. 물론, 늘 없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할 때 돈 자체가 어떤 영적인 가치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필요에 의한 통화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가 이 돈을 하나님만큼 사랑하고 섬길 때나 돈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기게 될 때 맘몬의 귀신이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통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돈 때문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돈에 의해 조종이 되고 돈에 모든 인간의 존귀한 가치들을 모두 쏟아버리는 것이다. 

돈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돈뿐이 아니라 지식, 학위, 명예 등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영향을 도모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게 되면 한 사람의 존귀한 인격이 물질에 종속되고 지배되며 그 인격의 가치판단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자랑

 

교회를 참 사랑하고 헌신을 하면서도 늘 한편 마음 구석으로는 세상에서도 인정받기를 원하는 분이 있다. 자아실현과 세상에 대한 공헌과 같은 꿈을 꾸며 일하고 싶은데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이 너무 많아 세상의 일에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주의 교회와 복음을 위한 일, 그 자체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너무 소중하여서, 자신은 사역자보다 더 헌신하고 기도하고 더 주의 일에 충성하는 그런 평신도가 되고 싶은, 그런 은혜의 마음은 왜 가지지 못할까에 대한 생각들에 절로 탄식이 찾아왔다.

물론 이민교회의 특수상황에서 보면 ‘이곳이 평생 내 교회’라는 관점이 아무에게나 적용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단돈 100불에 이사보따리를 싸고 쉽게 타주로 이사를 가버리는 분들을 보면서, 과연 그분에게 영적인 안식처인 교회는 그 100불의 한계도 넘어서지 못할 그런 곳이었나 싶은 마음에 아주 괴로운 기도의 시간들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사막광야를 살아가는 이민자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 때, 전혀 이해 못할 일도 아니겠지만 깊은 한숨과 탄식을 내뱉을 따름이다.

상당히 괜찮은 이력서를 가지고 있고 세상에 대한 공헌이라고 표현되는 인정과 성공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아직 유한한 인생의 한계를 분별치 못하고 있음과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일평생 주의 전에 머물며 주의 전을 위해 벽돌 한 장이라도 얹는 삶을 살았던 아름다운 신앙인들의 모습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할 따름이었다.

 

성도의 자랑과 사명

 

성도의 평생의 자랑이 무엇인가? 주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가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희미해지는 순간, 세상에 대한 욕망이 크게 득세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성공을 위해 열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을 주의 사명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면 결국 안타까운 결말을 가지게 될 따름이다. 

바울에게는 자랑거리가 참 많았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대인으로서 베냐민 지파요,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며,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는 바리새인이며,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을 했던 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 똥처럼 여긴다고 고백한다. 

그런 바울이 배설물과 같은 자랑거리를 밖으로 드러낼 때가 있었다. 자신의 화려한 이력서를 자랑하며 드러낼 때는 오직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자신의 삶을 간증하며 오직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간증할 때는 가감 없이 목소리 높이며 드러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최고의 유일한 자랑은 오직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였기에 그는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었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그 순간에만 삶의 간증처럼 자신의 자랑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 외 그에게 세상의 자랑은 그저 배설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랑과 추구할 것

 

무엇을 자랑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돈을 자랑하는 사람은 돈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힘을 자랑하는 자는 힘을 추구하는 자며, 지혜를 자랑하는 자는 지혜를 추구하는 자이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그 모든 것들은 똥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돈, 힘, 세상 지혜, 재능 등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똥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서로 자랑질 하는 것은 서로 자기 똥이 굵다 자랑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자랑과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말 우스운 것들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자랑하고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가진 세상의 자랑거리는 그저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자랑할 때만이 유용한 것이다.

꾸준히 나의 자랑,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쫓아가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쫓고 추구하고 가다보면, 그 마음과 생각이 자신의 추구하는 것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볼 것이다. 세상의 것을 따라가면,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고급스러워보여도 결국은 아둔한 자리에 이르게 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 없는 성공, 예수님 없는 출세는 결국 주님이 주인 되셔야 마땅한 자리를 노리며 주의 주되심을 위협할 것이다. 세상의 자랑거리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순간, 그는 죄인의 길과 오만한자의 자리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아둔한 자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다. 

 

주의 주 되심(Lordship)

 

많은 사람이 형식적, 명목적 그리스도인의 지위에 만족해한다. 성경적으로 볼 때 자신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행태이다. 성도의 자랑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자로서뿐 아니라 主(주인)으로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며 그가 나의 주인이 되셔서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나를 사용하시는 그분의 손에 붙들려 오롯이 그리스도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곳이 초막이든 궁궐이든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서로의 잘났음을 크게 외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내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들을 하나님은 간절히 찾으실 것 같다. 

davidnjeon@yahoo.com

1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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