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단순함

- 교회의 위기, 성도의 위기, 단순비결
전남수 목사

교회의 위기

 

예전 관광비자가 전자여권으로 바뀔 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한인 이민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고 이구동성 말했던 기억이 있다. 실제 이곳저곳에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났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예배가 활성화됨으로 교회로 모이는 성도의 숫자도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한국에서는 1만개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발표가 있었고 이곳 미주의 대도시의 교회들에도 작은 교회들은 재정과 시설 모든 면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더 나은 시설과 환경을 따라 눈길 손길이 가던 현실이, 이제는 마음껏 예배를 드리게 되었음에도 그 습관을 유지하거나 혹은 가까운 곳의 대형 교회로 이동하는 예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서도, 입을 모아 ‘교회의 건강하지 못함, 교회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근본에서 생각해보면 과연 교회에 위기라는 말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데 어떻게 교회가 위기를 당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교회가 문을 닫고, 교회가 어려움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교회의 위기가 아닌 다만 연약한 성도인 우리 ‘신앙의 위기’일 뿐이다. 환경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성도의 성도다움을 말씀으로 지켜내지 못할 때 그것이 결국 위기가 되고, 교회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성도의 위기

 

그러면 성도의 위기라고 말할 때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씀을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의 성숙과 성장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에베소서 4장13절 말씀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온전한 사람, 즉 성장과 성숙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름을 인정하면서 이것이 하나가 될 때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지적인 것을 말한다. 믿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행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는 것에 따라 행하지는 않지만 믿는 바에 따라서는 행하게 되는 존재이다. 아는 데서 끝나면 절대 신앙이 성장할 수 없게 된다.

믿음은 행함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야고보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며 부탁이다. 산상수훈을 강론하시면서 예수님은 마지막 부분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할 것을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의 두 부류이다. 신자도 영적으로 가만히 보면 두 부류로 나뉘어짐을 보게 된다. 참된 성도는 말씀을 들음이 영적인 지식이 되고 그 말씀이 믿어지고 마침내 그 믿음에 따라 행하는 순종의 과정을 지난다. 이것이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다. 

많이 듣고, 알고, 지식을 얻고, 정보를 쌓아 가는데 거기서 끝나버리면 하나님이 의도한 사람으로 자랄 수가 없다. 영적인 기형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머리는 큰데, 온갖 정보는 가득한데, 성경도 잘 알고 교계소식도 많이 알고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 소식들도 잘 이야기하는데, 그는 삶이 아주 까칠하기만 하다. 이유가 무엇인가? 행함이 없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그저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될 따름이다. 

 

깃털 빠진 기러기

 

집에서 기러기를 키워서 그 알을 파는 직업을 가진 이가 있다. 기러기 알과 기름이 동맥경화, 간염, 지방간에 효능이 있다는 소식에 꽤 괜찮은 직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러기는 철새가 아닌가? 철새는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오르는 그런 동물인데 어떻게 집에서 키울 수 있단 말인가? 영업비밀 같은 이야기이지만 기러기의 털을 몇 개 빼버리면 주위만 뱅뱅 맴돌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바다를 지나고 구름을 벗 삼아 V자 대형으로 멀리 멀리 날아가던 기러기가 이제는 시골 동네 아저씨의 애완용 집 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이 기러기를 통해 영적인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원래는 기러기처럼 창공을 날아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갈 수 있는 존재도 뭔가를 빼 버리면 시시한 집새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독수리 날개 치며 오름과 같은 삶, 높은 곳을 다니는 사슴의 발과 같은 삶을 원하시는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깃털이 빠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깃털 빠져버린 기러기가 되어 애완용 집새가 되거나 독수리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참새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성경에는 현상적인 열악함을 말씀과 성령, 믿음의 행함,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되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넉넉하게 잘 감당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평범한 제자들의 땅끝비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고기잡이를 해서 좋은 수익을 얻고 날씨가 궂은 날이면 그저 하늘만 원망하며 살던 평범한 어부들이었다. 그러나 저들에게 차별 없이 성령이 임하게 되니 단 한번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벗어나본 적이 없던 저들이 감히 볼 수 없고 생각의 상상조차하기 힘들었을 땅끝을 보고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 반대편도 서슴지 않고 달려갔으며, 타향과 타국에서 순교의 귀한 제물이 되기까지 아름다운 비저너리의 삶을 살아내었던 것이다. 귀한 복음의 말씀들이 그대로 믿어지게 되니 아무런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원래 복음과 말씀이 그런 능력을 본질로서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이 되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부족한 사람이라도 주님의 말씀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온전한 능력의 역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요, 말씀이다. 조선시대 복음이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보라. 저들 대부분이 상놈, 거지, 백정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경에 상관없이 진실로 그 말씀을 이들에게는 한결같은 은혜들을 부어주시고 강력한 복음의 힘에 의해 강력한 부흥을 맛보게 하셨던 것이다.

 

생명과 구원, 그 풍성함

 

그런데 이러한 복음의 말씀들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날마다 큰 일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인가? 왜 기러기의 털 몇 개가 빼내어져 애완용 집새가 된 것처럼 독수리 날개치고 날아오를 사람이 집에서 참새처럼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며 손바닥으로 마룻바닥 먼지만 딱고 있는 것처럼 왜 그렇게 전락한 것인가? 한마디로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여 말씀을 듣고 알기는 하여도 그 말씀을 전인격적으로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 한국에서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심방을 갔었다. 괜찮은 집안배경과 삶의 여유가 있는 넉넉한 집이었다. 그런데 심방 내내 안주인 집사님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문지르며 닦는 것이었다. 조용히 이유를 물어보니 청소기로 청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청소가 된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시간이 참 잘 간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주의 복음의 사명 앞에 불꽃같은 제자로 살아야 될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방치되어 헛된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그때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제자훈련 목회에 대한 첫 마음을 품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개척된 교회이름이 ‘제자들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성도의 삶에 말씀을 터치하며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함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견인하는 것을 목회철학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구원 그 이후의 삶을 풍성케 하심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약속의 말씀들에 대해 전인격적인 헌신과 순종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의 주되심, 기적

 

첫 번 기적에서 나타난 일이다. 아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아는 마리아가 아들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일을 말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 뒤처리해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일하심으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의 주되심(Lordship)을 결코 세상 앞에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셨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주님 되심이 인정되는 곳에 기적과 능력과 은혜, 귀한 간증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언제 주의 주 되심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까? 말씀에 대한 순종의 행함 위에 드러나는 것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가나의 기적도 돌 항아리 손 씻는 물을 뜨다가 연회장에 전달할 정도의 단순한 말씀의 순종위에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과 삶에 왜 세상에 치이는 것만 남았고 기적과 능력의 일들은 볼 수가 없었던 것인가?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을 말하지만 실제 이유는 한가지로 명백하다. ‘내가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으로, 주의 능력이 드러날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란 것이 ‘어떤 문제가 터지기만 하면 쪼르륵 달려와 해결사(?) 일을 감당해 달라는 요청’과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때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답을 주실 따름이다.

 

세상승리의 원천, 순종

 

예수님 안에 참된 생명과 기쁨이 존재한다. 세상이 주는 기쁨도 상당히 유혹이 될 만하다. 그러나 실제 최고의 주님이 만드신 포도주가 주는 기쁨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것은 그저 시시한 배설물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을 이길 힘,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넉넉하게 이기는 비결이 있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말씀이다. 복음이다. 그런데 그 말씀의 복음을 아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진실로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이 그의 손과 발을 움직이는 행함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더불어 그렇게 믿고 행하는 그에게 주님은 당신의 능력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실 것이다. 당신의 영광을 지키기 위하여.

davidnjeon@yahoo.com

10.30.2021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