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주인에 대한 고려
세상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에 대한 자랑이 많을수록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무병장수, 입신양명, 자녀출세’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 가지가 없으면 통째로 어리석은 바보 인생이 된다고 경고를 던진다. 예수님께서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신 말씀에 그 교훈이 담겨 있다. ‘당신의 영혼의 주인’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한다. ‘네 영혼의 잘됨”이 전제되지 못하는 삶의 형통과 건강은 그 자체가 아둔한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그를 좇던 많은 무리들의 마음에는 각자 원하는 소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소원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른 것들이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의 먹고 마시는 것에 마음을 두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예수님을 왕 삼고자 따랐던 것이다.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행하셨던 기적만 계속 행하여 주셔도, 자신들은 농사짓거나 일할 필요 없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지자, 예수님을 떠나버렸고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님을 좇았지만 제자의 자리에 들지 못하는 그저 무리(Just gathering)의 삶을 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무리들처럼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선생님의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신앙을 가지는 이들이 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서 자신은 간데없고 오직 주님의 영광, 주님의 사명, 주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 사는 삶에 초점 맞추는 삶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존재하는 삶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그들이 바로 참된 제자들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빵을 구하던 저들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을 통해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만을 바라보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으로 점철되는 모습은 모세시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맥을 같이한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즉각 달려오는 핸디맨이나 알라딘의 마술램프의 지니처럼 그들에게는 예수님도 그들의 종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삶의 기준에 부합되거나 도움이 되어야 교회도 가고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겠다고 한다. 저들에게 믿음은 믿어주는 것이고 교회는 가주는 것이며, 헌신은 그저 마음 기쁜 봉사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신앙에 자기 자신을 부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기준에 신앙을 맞추는 것은 세속 종교인의 종교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예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너무 바쁘면 교회도, 예배도, 기도도 하기 어렵다고 한다. 힘들수록 교회 와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힘들어 죽겠다는데 교회가 웬 말이냐? 라고 항변한다면 그는 참 복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일이라면,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 와서 예배하며 자신의 삶과 영혼을 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한결같이 계속 그렇게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일을 하다보면 나중에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명과 영혼, 예수님
이 땅에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영혼을 손해 보면서까지 할 일은 없다. 모든 노력과 수고가 모두 생명과 영혼이 잘되는데 초점이 맞춰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예를 들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며, 38년된 병자의 병을 고쳐주셨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기적의 역사들을 보여주셨다. 게다가 때로는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셔서 잔치집의 낙망할 분위기도 더 큰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이모든 기적의 현장들은 결코 이 땅의 삶의 질에 대한 조금 더 나은 진보만을 위해 하신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의 초점은 한가지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영원한 것을 붙들도록 하는 통로, 도구로 기적의 현장들을 잠시 사용하신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삶의 모든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왜 그러한지는 조금만 생각을 이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주님이 병을 낫게 해주신 간증이 아무리 귀하여도 결국 나이가 들면 모두가 늙고 병들고 죽기 때문이다. 위암이라는 병을 고쳤다고 다른 부위에는 종양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입고 여든 살을 살았다고 할 때에 42동안의 그의 삶에 질병하나 없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성도들에게 안경을 벗어던지고, 그 안경을 밟아 버리고는 이제 눈이 좋아졌다고 외치는 부흥강사가 있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에게 지팡이를 버리고 꼿꼿하게 서서 한번 걸어보라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 노안이 찾아오고 눈이 침침하여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또 허리가 굽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노화의 과정이지 않은가? 굳이 안경을 벗어야 될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이적의 목적일 필요도 없고, 지팡이 짚은 노인의 연로함이 추하고 안타까울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예전에 마술사가 숟가락 굽히기를 잘한다고, 묘기대행진에 나와 특별기술이라고 자랑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이빨이 황금 이로 변하든 그렇지 않던 음식만 잘 씹어 삼킬 수 있으면 되지 않는가?
참된 성도의 강조점
참된 성도는 건강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던 그렇지 않던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확신하며 주님 주신 생명의 시간동안 주님 맡겨주신 교회와 복음을 위해 최선의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이 인생은 죄를 씻고 독특한 존귀함과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인도에 가보면 특히 담장들이나 철조망이 많은 것을 본다. 그리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너무 삶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목격한다. 담장 안 호텔이나 유명대학이나 관공서는 대리석과 황금빛 장식의 화려함이 대단하다. 그러나 당장 담장을 넘어서면 구걸하거나 길거리에 노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본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구걸을 더 잘 하도록 하기위해서 스스로 신체를 훼손하여 더 불쌍히 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러니한 상황이다. 살기위해 구걸을 하는데, 오히려 살아있는 생명체를 스스로 훼손하여 생명을 보존하려 하다니 이해하기가 어렵다. 생명과 삶의 기본적인 가치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인데, 그들의 삶의 정황들이 있겠지만 이해로서는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삶의 우선순위
이민자들의 삶에도 그런 요소들이 존재한다.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애를 썼는데, 그 결과가 너무 허무하고 공허해지는 결과를 보는 일들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다. 이민 초기에 미주로 건너와 밤낮없이 ‘여봉남청’이라고 종일동안 여자는 봉제공장, 남자는 야간 청소업으로 그렇게 2-3개의 일터를 가지고서 죽도록 고생했다는 것이다.
결국 남들이 말하는 성공은 했고 성공을 자랑할 준비는 다 되었는데, 정작 그 순간 돌아본 삶의 주변이 너무 황폐해있더라는 것이다. 건강은 말 못할 정도로 나빠졌고, 기대했던 자녀들은 오히려 고통의 짐들이 되어졌고, 가족 간의 관계들도 파괴되어 인생을 헛되게 살았노라고, 탄식하고 원망하는 이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는데, 외려 앞뒤 돌아보지 않고 너무 열심히 살았던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공허와 허무함으로 매조지[일의 끝을 단단히 단속해 마무리하다는 의미: 편집자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절망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70-80년대 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사연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젠 고름처럼 배집고 흘러나오는 작금의 이야기들이다. 모세시대에 광야를 지나는 백성들이나, 초기 이민자들이나, 지금의 세대나 모두가 동일한 인생의 근본 지혜를 구하지 못하면 시대와 환경을 떠나 허무와 공허 속에 삶이 통째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에 멈추어 생각
하나님의 사람들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대로 살면 잘 사는 것인가? 먼 훗날 주님 앞에 서는 날이 가까워질 때 후회와 한숨으로 점철된 그런 삶은 아닐까? 멈추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차를 운전하면서 신호등 앞에서 생각을 한다. 파란불에 차가 달려간다. 그러나 빨간 불에는 차가 멈추어 선다. 어떤 대단한 차도 이 규정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이 규칙은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달력에 빨간 날은 무슨 날인가? 주님의 날, 안식일이다. 세상의 모든 수고를 잠시 멈추는 날이다. 그저 일 안하는 날, 일 안해도 좋은 날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안식하는 날, 영혼과 육신이 새롭게 재충전 하는 날, 한주간의 도끼날을 새로 가는 날이다. 이날만이라도 허리띠를 풀고 여유를 가지면서 주님의 교회에서 머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직장, 사업장, 가정, 자녀들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그분이심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의 기초가운데 살아가는 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며 삶의 시간들을 깊이 생각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 빼내어 버리고 기초를 든든히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회한 가득한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데, 실제 그 내면은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의 모습으로 가득하다면 그것만큼 소모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davidnjeon@yahoo.com
09.1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