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역사 변화의 능력

- 가짜와 진짜, 신앙의 확장성, 단순함
전남수 목사

한 사람의 자연인

 

지난주간 한국에 머물면서 있었던 일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영웅이었던 무척 신앙이 좋았던 선수가 일반 TV에 등장했다. 당시를 기억해보면 무척 좋은 마음이 들었다. 골이 터지면 그는 제일 먼저 엎드려 무릎으로 기도하고, 기독교방송의 간증 프로그램에서 간증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슨 사연인지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가 7년 세월을 은둔하면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다는 내용이 방송에 소개 되었다. 산에다 집을 짓고 사는 것, 취향 따라, 워낙 다양한 세상에 그럴 수도 있는 삶의 형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드는 생각은 “길을 잃었나? 길을 잃은 건가? 길을 잃었구나!”하는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왜 저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많은 사람을 대하면서 체화된 특별한 감각의 반응이 그러했던 것 같다. 

목회자로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접하다 보면 그가 하는 말투, 자세, 눈빛 등 이런 것들이 상대의 입술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언어로 전달되는 것을 느낀다. 쉽게 판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늘 성경연구와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다보면 직감하는 것이 많이 틀리지 않음을 보게 된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틀이 넓어지면서 얻게 된 생각들이다. 

물론, 이런 방식의 폐해도 상당하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게 너무 선명하고 분명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길게(?)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들어도 성경이 말하는 답이 뻔한데 왜 시간을 낭비할까? 하면서 정확한 답을 빨리 내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옆에서 이를 보던 아내가 거들게 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배려’라는 것이다. 아내의 긴 설득에 동의가 되어서 올 한해는 한해의 화두를 ‘경청(傾聽)’이라고 짓기도 했다. 암튼, 목사가 무당 점쟁이는 아니지만 사람을 보면 언뜻 느껴지는 정황 속에서 생각되는 일들이 있고 그것이 그렇게 많이 틀리지 않음을 본다.

 

성도는 개인에 머물수 없음

 

그 크리스천 유명인이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대수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있기에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렇게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삶, 마음 가는대로, 생각 되는 대로, 또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나침반과 관계없어 보여도, 자기의 뜻한 바대로 막 살아가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더라는 것이다. 마음 가는대로 넋 놓고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런 생각들 속에 조금 더 영상을 보노라니,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온갖 종류의 담금술을 담아두고서는 그의 치적들을 자랑하는 것이다. 더불어 동네사람들과도 어울려 막걸리 한잔씩 하는 모습이다.

저 사람, 왜 저렇게 살지? 이런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자, 옆에서 다른 이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목사님 냅둬요. 자기 인생인데, 알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겠지요?’, ‘목사님 술 한잔 하는 것 가지고 뭐 그러세요. 요즘 세상에’ 물론 이분들도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다. 게다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하니, 좋은 수면법이라며 추천한다. ‘와인 한잔 하고 푹 주무세요. 요즘 세상에 누가 술 담배 가지고 뭔 신앙을 논합니까? 술 담배 하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데요. 스펄젼 목사 같은 사람은 골초였습니다.’ 이러다가는 노아 할아버지도 애주가였다는 말까지 나올만한 상황이어서 속히 말의 매듭을 지었다. 

 

사연을 넘어서는 기준

 

사연이 있을 법한 사람,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 자연으로 귀의할 만큼의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여러 가지 사연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한가지, 아무리 수만 가지 사연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기본이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그 성공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따로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결같이 더욱 귀한 은혜를 끼치고, 영적인 유익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그런 삶에 대한 기대감들이다. 물론 인간이 연약할 수 있다. 주의 제자들도 수없이 넘어졌지 않은가?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신앙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차라리 그런 모습을 자랑스레 광고할 이유는 없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간증이 있는 신자와 가짜를 헷갈리게 하는 선명하지 못한 삶이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념조차 생각하지 못할 만큼 연약하여진 상태라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의 혼동

 

오늘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종말시대에 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와 자신을 참된 주님의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다가 주님의 판정에 놀란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는 말에 일순 긴장감을 가진다. 주여 주여 한다고 모두가 성도가 아닐 수 있다는 것,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자세히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니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래 다녀서 교회생활이 익숙했던 것이라는 정체가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출석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나중에 주변 사람들의 추천과 권유로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데 그들이 왜 관을 쓰고 있는지 모를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마치 사울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씌워주신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지만 그가 하는 일들은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듯이 더 나아가 하나님의 후회거리가 되었듯이 오늘날 목사 장로 권사의 타이틀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쉽게 보게 된다. 울산의 어느 교회가 새가족 초청을 하고 오랜 세월 공을 들여 무당 점쟁이를 전도했는데 그 교회 권사들 가운데 그분의 고객이 있더라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고 하니, 정말 진짜와 가짜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은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많은 가짜, 신앙의 확장성

 

성경은 그러한 이들이 소수가 아니라, 종말시대가 되어 갈수록 정말 많다고 예언한다. 종말시대에 홍수 날에 파도 같은 세파에 휩쓸려가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다는 말씀이다. 자신이 가짜인줄 알고 진짜처럼 행세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자신을 진짜로 착각하는 가짜들의 인생이다. 특별히 그런 이가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요, 교회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선하지 못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큰일이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개인주의에 머물 수 없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행16:31)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신앙의 확장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 예수를 믿을 때 참된 믿음을 가진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마침내 그 가정과 가문이 변화될 것,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실제 한국에 복음이 처음 들어간 때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종국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침내 그 가정과 가문을 전도하고, 저들 가문에서 목사 선교사 교사 등의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일꾼들이 배출되는 믿음의 명문가문들을 이룬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집안에 제일 약한 막둥이가 예수를 믿었는데 그 복음의 능력이 부모와 형제들을 전도하고, 마침내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첫 세대가 되는 것도 보았다.    

 

기준과 상대주의 관점

 

그런데 오늘날은 왜 이렇게 기독교가 흥왕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변화의 역사, 복음의 능력을 목도할 수가 없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한다. 복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듣는 인생이 그 기준을 지나치게 상대주의적인 관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이것이 틀렸다’라고 말하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한다. 좀 더 나아가면 ‘무엇인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라는 포용성을 내세우면서 진리의 잣대가 될 기준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굉장한 포용력을 갖춘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진리의 기준이 선명하지 않고 선명하지 못한 기준으로 문제를 대하고 처리하는 과정 속에 결국 그 공동체가 해를 입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삶도 흐려지는 것을 본다. 지나친 관용이 자신의 삶에 쉽게 적용되므로 자신의 삶의 해이와 더불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마저도 쉽게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것을 본다.   

그래서 이제는 종말 시대가 되어갈수록 성경을 꾹꾹 눌러 읽지 않으면 성경의 진리를 놓치기 쉽게 되어 버렸다. 예를 들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 제대로 진리성을 드러내려면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이다. ‘주 예수를 (제대로) 믿어라, 그리하면 (반드시) 너와 네 집(네 삶의 지경과 만나는 이들에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 

너무 슬픈 현실이다. 진리의 말씀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게 믿고 반응하면 될 일인데 너무 많은 사상들이 진리를 훼손하며 자기 방법으로 믿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진 분들이 하나님 영광보다 자신의 삶에 천착하는 일들로 인해 복음의 확장성을 장애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더욱 복잡해진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소망하고 기대하며 살아가야 될 것인가? 스스로 복잡한 인생을 살 이유가 없다. 다시 한번 더 진리 앞에 간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영혼을 장애하는 모든 것들을 힘써 대적하며 오직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말씀에 대해 선명하게 복종하며 당당하고 당차게 살아갈 따름이다. Simple Life, High Spirituality. 

davidnjeon@yahoo.com

08.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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