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TRUTH, 탈진리’의 시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섬기는 장로이면서 학자로서도 명망이 있는 강영안 교수가 강의한 내용의 일부이다. 마지막 종말시대, 신(新) 사사시대를 살아가면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를 즐겨하는 이 시대를 잘 지적하는 내용이 있어서 옮겨 본다. 코로나 이후 시대에 목회자들이 어떤 목회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 강의였다. 그는 세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이 시대를 설명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가치관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세속주의(Secularism)’이다. 두 번째는 ‘다원주의(Pluralism)’에 대한 논설이었다. 앞선 두 가지의 관점은 익숙한 것이었는데, 마지막 세 번째 논점이 가장 눈에 띄는 구석이었다. 이를 그대로 옮겨본다.
“세 번째 키워드는 ‘관점주의(Perspectivism)’이다. 너는 그 관점으로 보고 나는 이 관점으로 본다. 너의 진리가 나에게는 진리가 아니다. 각 입장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인다. 모든 사실은 해석된 사실일 뿐이다.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관점주의의 영향이다. 이런 관점주의가 최근에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포스트 트루스/탈진실’은 무엇이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 참이면 참이고 저쪽 편이 참이라고 하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 트루스’의 부산물이 바로 ‘가짜 뉴스(Fake News)’이다. 무엇이 사실이냐? 무엇이 참이냐? 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내가 좋아하는 내 편에 의한 뉴스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더 많다.”
탈 진리 혹은 저자가 말하는 언어대로 탈 진실의 시대로 번역될 수 있는 ‘POST-TRUTH’라는 말에 느낌이 다가왔다. 달리 표현하면 진영논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바른 진리의 판단기제 없이 내편이면 옳고 다른 쪽 편이면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는 그런 기대를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진리에 의해 삶의 내용이 해석되고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친소관계와 이해득실(利害得失)에 의해서 삶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분별력
강영안 교수는 ‘포스트 투르스’의 시대를 지나면서 대안을 말했다. 그것은 진리를 분별하여 가려낼 수 있는 성도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팩트 체크를 할 수 있는 분별력 있을 성도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역할을 할 수 있는 언론의 사명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이런 사람들의 주장도 들어보고 그 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성도로 성장 양육해야 한다는 의미를 언급한 것이다.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지만 굉장히 훌륭한 관점을 말씀하는 강의였다고 느껴졌다. 시대를 읽고 분석하는 철학자의 지성이 느껴지는 강의였다. 그러나 여러모로 분석의 관점에는 동의가 되면서도 강 장로님이 대안이라고 하는 그 결론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워낙 사람 상호간에 신뢰를 쌓지 못하기에 나타난 현상인지, 대화가운데 아주 자주 등장하는 질문중의 하나이다. ‘팩트가 뭐냐?’는 질문이다. 팩트를 확인한 다음에 뭘 하자는 것이다.
쉽게 누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잘 믿어주지를 않는다. 먼저 사실인가를 확인하고서, 다음에 이야기를 진행하자는 것이다. 상당히 의미 있는 어조이지만 실제 나타난 현상들을 보면 별로 유익함이 없다.
처음에는 팩트만 확인하자는 것이, 이제는 ‘당신이 말하는 그 팩트가 과연 참인가? 거짓인가?’에 대해서도 또 다른 부가적인 논쟁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골치 아픈 시대의 흐름이다.
전제, 그리스도인, 성경
이러한 복잡 분주한 세상가운데서 적절한 팩트를 분별하고 실제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적인 훈련 혹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제’라고 하는 안경을 잘 쓰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고 하면 그의 신앙생활에 나타난 은혜를 부여잡고 영적인 감격과 기쁨, 성령의 음성에 대한 순종을 통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대 전제를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이루어갈 것이다. 만약 그러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준비되지 못하면 스스로는 자유를 말할지 몰라도 실제 그의 삶은 우주공간에서나 경험하는 무중력 상태의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설교를 들어도 이것을 단순히 목사님의 성경에 대한 견해(Just his opinion)로 상대화 시켜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말씀이 주는 신앙의 유익들을 누리지 못하고 오랜 시간 방황하는 것을 보았다. 결국 팩트와 함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아주 중요한 논거의 하나가 바로 ‘전제’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전제라고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진영의 논리와 다른 것이다. 진영의 논리가 단순한 어린아이의 ‘편 가르기 싸움’ 같은 내용이라면 여기서 전제라는 것은 궁극적인 인생의 유익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관점, 성경의 관점에 대한 전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 대한 구별된 생각 없이 그저 팩트만을 구별하려 들고 이런 저런 의견과 주장들을 듣다보면 특별히 교회공동체에서 그런 일이 행해진다면 아주 최악의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시끄러우면 조용히 성도들이 떠나는 곳이다. 많은 회의를 통해 회의감이 생겨서 교회를 가나안(?)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리자체의 팩트에 앞서는 성경적인 전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인식이 삶의 유익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 여겨진다.
팩트를 넘어서는 진실, 분별과 사랑으로
그러면 탈 진리의 시대에 어떻게 논쟁과 논거를 적절히 조정하며 주의 교회와 복음에 유익함을 끼치는 분별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최근 한국 뉴스가운데 이런 관점에 의한 실제적인 논쟁거리가 등장했다. 생각하면 이해될 수 있고 전문가의 의견에 대해 동의를 하면 될 것을, 거기에 정치가 개입되니 아주 어린아이 말싸움 같은 일이 나타난 것이다. 누가 들어도 상대방의 관점에서 들어주면 될 것을 끝까지 자기들의 진영논리에 붙들려 어린아이 같은 말싸움을 한 것이다.
그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과도 관련이 있는 것인데, 미군이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하는 논쟁이다.
팩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이슈가 되었다. 양쪽 진영의 견고하게 굳어진 논리 앞에서 어린아이가 들어도 이건 편싸움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싶은 언어의 전쟁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때에 교단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두루 공부하고 중국선교사로 오랫동안 헌신했던 김동춘 목사님의 아주 선명한 논리를 소개하면서 팩트와 분별의 문제에 대한 ‘팁’을 얻고자 한다.
김 목사님의 상황과 배경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두루 두루 화평과 인정을 도모하는(?) 답에 동의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 또한 변증의 원리의 한부분인 제3자의 것을 쉬 취하는 언어의 기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동의하는 부분은 김 목사님이 거친 만주벌판에서 선교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모든 논리와 생각을 사로잡아 궁극적으로 지향하며 나아가야할 그리스도의 표준, 성경의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맥락을 학자이면서도 목사로서 선명하게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팩트를 넘어서서, 팩트의 분별의 능력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모든 분란, 나뉨. 갈등을 치료하면서 가져야 될 전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너무 필요 적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본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팩트’라는 사실적인 측면을 넘어 진실이라는 또 다른 관점을 늘 가져야 한
다. 그것이 바로 분별력이고 통찰력이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하셨다. 요한1서 4장에는 잘못된 영에 대해서도 분별력을 가지라고 말씀했다(요일4:1-3).
하지만 역사적 사안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논쟁을 할 때 그들에 대한 대처방식은 늘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의 중심에 견지해야 할 것은 사랑의 태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자체는 사랑 그 자체, 사랑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1서 4:7-11).
마지막 대목에서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의 논리 속에는 분노와 적대감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논쟁이 있을 때마다 그 배후에 그런 정서가 있음을 눈치 채야 한다. 점령군, 해방군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늘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에게는 분별력과 사랑이 중요하다.
우리는 과거사를 대할 때마다 포용성이 있어야 하고 또 논쟁하면서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 혹은 정치적 사안을 대할 때마다 넓은 관점에서 통찰력과 안목을 가지면서 접근하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잣대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실의 관점이다.”
davidnjeon@yahoo.com
07.2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