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 역설적 은혜
코로나로 인해 무너진 교회의 모습들이 있다. 교회 건물이 훼파된 것이 아니라 일년 넘게 온라인 상황 속에서 예배드리다보니 성도들의 예배가 많은 부분 무너진 것이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출판된 도서와 여러 기사들을 취합해보면, 제일 많은 것이 예배의 회복에 관한 주제의 책들이다. 목회자들이 지금같이 한 마음으로 예배를 회복하자고 부르짖던 때가 있었던가 싶은 마음이다. 이것이 오히려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가장 영적으로 취약할 수 있는 상황들이 오히려 가장 은혜의 갈급함을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빚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역설적인 은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왜 목회자들이 교회의 예배출석 상황에 대해 긴장하게 되는 것일까? 예배가 신앙생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예배를 강조하는 목사를 향해, 마치 재정이 부족해서 목회자들이 교회경영을 위해 헌금을 거두기 위함이라고 매도한다. 이것은 스스로 자기 영혼을 사단에게 내어다 파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교회를 사업장 비즈니스로 여기고 쉽게 말한다면, 교회를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영혼은 가게에 진열된 물건상품에 불과하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코로나의 어려운 환란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많이 악해졌다는 증빙이 된다.
세상회복의 원형
예배의 회복은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원형과 기본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가운데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셨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사람에게 맡기시려고 지으신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으며 이들을 창설하신 동방 에덴에 동산에서 살게 하셨다. 사람을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하사 만물을 관리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그들은 복을 받은 존재가 되어 복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언약한 대로 살지 않으면 정녕 죽게 되어 있었다. 다른 피조물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하는 존재로 세워진 것이다.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는데 그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된 구별됨이다.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 결국 저들은 그 약속을 어기고 뱀의 유혹에 넘어져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
그 결과 저들은 모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한 기업들을 상실한 존재가 되었다. 선악과 열매를 먹기 전에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나 교통(교제)할 수 있었으며,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존재였다. 원형의 예배, 에덴의 예배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삶이었다. 생명과 교제의 풍성한 누림이 있는 삶이었다. 하나님을 만나 예배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는 삶이었으며, 하나님을 예배함에 형식조차 없었다. 특별한 규칙이 마련되어있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사는 삶이 아닐 만큼 사람에게 중심이 옮겨져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신 것이다
예배실패와 기업의 상실
에덴의 예배가 살아 있을 때 그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주신 복이 저들에게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저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볼 때마다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뱀의 유혹에 넘어가 열매를 먹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상실되었다. 에덴의 예배가 무너진 이유는 한가지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예배의 무너짐과 결을 같이 한다. 성경 안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예들이다.
불순종으로 인한 에덴의 예배는 더 이상 그들에게 주어진 복을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 생명은 무한에서 유한으로 전환되었다. 하나님과의 만남,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었던 에덴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땅의 기업은 인생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고, 인생의 종신토록 수고함과 땀흘림을 통해야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예배의 회복, 인류의 회복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예배의 실패는 인류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이루지 못한다면 결코 온전한 회복은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의미는 예배의 회복이라는 말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을 함축한다. 왜 모든 민족과 열방에 예수님을 전해야 하는가? 왜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섬겨야 하는가? 예배의 문제 때문이다. 인류전체 모두가 생명과 교제와 기업의 회복을 이루려면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나라들의 죄로 인한 분열과 나뉨, 파괴는 하나님 안에서 복을 상실한 인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말씀의 불순종, 예배의 상실로, 하나님의 영광이 상실된 모습이다.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영광을 받기 위해서인데 그 영광을 받으시는 통로가 무엇인가? 예배다. 오직 예배이다. 에덴에서의 예배를 상실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그 영광을 회복할 길은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 죄인이 온전한 예배자로 변화가 되는 것 외에는 없다. 이들에게 예수가 증거 되고, 예배가 회복될 때, 온전한 회복의 역사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왜 예배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삶,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의 만남 그 자체가 온전한 예배라고 할 때, 죄로 인해 타락한 인생이 올바르게 예배를 회복한 모습이 무엇인가? 다시 주와 동행하며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회복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인생의 예배를 받아주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저들은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셨다. 말씀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악 가운데서도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던 그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다. 그리고 동물의 가죽옷,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나아가는 그들을 친히 만나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사람이 드리는 제사를, 죄인이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친히 받아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만나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 된 인생이 드리는 제사를 받아주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회복을 위한 길을 스스로 열어주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고 교제하였고 생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에게 예배를 가르쳤다. 때가 되어 스스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그를 만나고 교제하도록 한 것이다. 그 예배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 그리스도의 죽음이 위치해 있다.
자비와 긍휼, 만물의 회복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심판하시는 일에 아주 성실하시다. 사랑하는 자녀와 같은 존재라 하여도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 때, 가차 없이 징계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심판에 성실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그 성품이 자비와 긍휼하심을 드러내시는 일에도 너무나 성실하신 분이시다. 얼마나 성실하신지, 인류구원의 언약의 역사를 지키시기 위하여, 당신의 공의와 사랑이 성실로 만나는 지점에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었다.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라도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언약대로 사랑과 긍휼을 덧입혀 자녀가 되게 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을 주시기까지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정하시는 분이시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에 너무나 성실하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격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랑과 자비의 결정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 복음을 믿고 바라는 이들에게 주시는 회복이 어디에 있는가? 예배의 회복가운데 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마침내 회복을 바라보게 되고, 온전한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의 회복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의 회복, 인류의 과제
예배의 회복은 마침내 모든 것을 온전케 한다. 예배회복의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주신 복 곧 기업의 회복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의 회복을 이루기 위해 예배회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언약대로 기업이 회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회복은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이 된다. 성경에는 수많은 예배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제사와 제사장 백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신약에서는 예배라는 말보다는 희생 사랑 섬김 등 수많은 단어들로 파생되어 나타난다. 여러 가지 퍼즐처럼 나누어져 있지만 한가지로 짝을 맞추어 보면 결국은 예배라는 뜻이 된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사람에 마땅한 본분이다. 이것은 진리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결코 변할 수 없고 변질되어서도 안 된다. 예배의 시조는 하나님이시며, 단의 제사로부터 예배를 받으시고 열납하시는 주체는 처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고 열납하시는 그 예배가 회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배회복은 오늘날 코로나를 지나며, 그저 시대적 상황에서 필요에 따른 간절함으로, 또 어떤 상황을 한번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래서 언젠가는 소멸할 어떤 유행의 어젠다와 같은 말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는 인류전체의 과제이다. 오직 인류가 살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6.1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