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한 영혼, 세상의 변화

- 생명, 목숨, 영혼
전남수 목사

생명과 목숨, Life 

 

인생은 그 사람이 가진 삶의 우선순위로 그 열매가 결정된다. 우선순위대로 하루가 결정되고 일년 십년이 결정되고 결국 그 인생의 모습이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진 삶의 우선순위를 들여다보면, 그가 생각하는 인생의 가치가 고스란히 묻어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진 삶의 우선순위에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 모든 가치와 우선순위들은 한 가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목숨, Life(인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어떤 삶의 내용을 질문해도 한결같은 답을 한다. ‘먹고 살만 하십니까?’, ‘아뇨,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습니다.’ 등등. 그래서 생활의 기본단위를 의식주라고 표현하면서 ‘입는 것, 먹는 것, 사는 것’이 모든 삶의 기초와 기본이 됨을 말한다. 결국 육신의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기초적인 의식주의 바탕위에서 더 힘쓰고 애쓰므로 말미암아 자신의 목숨과 생명을 위해 자신의 인생살이가 좀 더 나아지고 풍족해지는 것을 만드는 일에 진땀을 흘리며 초점 맞추어 사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그렇게 대단한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땀 흘리고 살아도 특별히 별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부자라고 특별한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요즘 같은 시대에는 부자들일수록 더 예전 가난할 때 시골 농부들이 먹던 밥상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참 모를 일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목숨과 생명을 위하여 그렇게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힘들게 고생했는데, 정작 그렇게 살고자 애쓰다보니까 오히려 생명과 목숨, 즉 건강을 해치는 어려움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목숨

 

그러면 목숨과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성경도 세상 사람들이 갖는 생각처럼 목숨과 생명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하나밖에 없는 이 소중한 목숨. 이 생명과 바꿀 수 있는 일은 천하 어디에도 없다고 말씀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이 말씀을 가지고 보통 많은 이들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해석을 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영혼이라는 영적 접근에 앞서서, 아주 명백하게 ‘천하보다 귀한 것은 바로 네 목숨, 네 생명’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이 소중한 목숨. 이 생명, 이것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어떤 사람도 부정하지 못한다. 모두가 절대 동의하게 된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이것 앞에 못할 것이 뭐가 있느냐?’는 사상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가난하고 천박한 인생들이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보면 평생을 학자로 살고 자신의 학문적인 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이들도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자존심보다 생명과 목숨을 더 앞세우는 것을 본다.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공격한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발이 묶여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게 되는 데 성안에 갇힌 조선은 성 안에서도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인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싸움이다. 누가 승리했을까? 청에 의해 망국에 접어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척화파와 항복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이고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의 대립이었다.

누가 제일 목소리가 컸을까? 무엇이든 원칙론이 목소리가 제일 큰 법이다. 그러나 실제는 주화파의 주장이 이긴다. 당장 성문 앞에 청나라 대군이 도열하고 있음에, 달리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주화파의 대장 최명길이 한 말이 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는 내용이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이자는 입장이다. 많은 사람이 어려운 전쟁의 문제가 다 지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를 향해 무수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것은 비겁한 선비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에 직면했던 그 시기에는 아무도 그를 반대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후에 영의정에 오르며 최고의 외교가로 정평을 얻게 되었다.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유지보존 해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면 자존심도 버리고 고개도 숙일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이다.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옳고 그르고를 넘어서는 문제가 목숨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목숨과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을 잃으신 분들, 건강을 잃고 천국에 가신 분들도 한결같이 목숨과 생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유언을 남긴다.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니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한다. 몸을 혹사하지 말라,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다짐하게 하고 복명복창을 강요한다. 

 

육신을 이기는 영혼

 

성경도 사람의 목숨을 아주 귀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을 귀하고 좋은 일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목숨을 보존하기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사는 것은 아주 악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생명과 목숨을 더 연장하기 위하여 온갖 애를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왜 성경은 자신의 목숨과 생명만 집중하며 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했을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운데 그 의미를 찾게 된다. 원래 부자였던 사람이 풍년이 들어 더 소출을 많이 얻게 되니, 마음이 너무 기쁘고 좋아서 오버하게 되었다. 자신의 많은 소출이 자신의 영혼까지 책임져줄 것처럼 착각과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 부자를 어리석은 바보인생의 반열에 떨어지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성경은 부자를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게으른 것을 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문제는 무엇인가? 생명과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목숨이 짐승의 목숨과 다르게 의미 있도록 만드는 영혼의 존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욕심을 다하여 목숨과 생명을 위하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하여도 결국은 쇠하여질 뿐인 이 땅의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영혼의 가치와 존귀함을 간과해 버린 것이다.

인생은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 상태의 인생은 종국적으로는 결국 허무와 공허를 견뎌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 모든 허무와 공허를 극복할 길이 무엇인가? 영혼에 초점을 맞추어 육신의 목숨이 다한 후에도 죽음 그 이후에도 영원히 죽지 않을 영혼의 복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다. 이 모든 허무와 공허를 극복할 길이 무엇인가? 영혼에 초점을 맞추어 육신의 목숨이 다한 후에 죽음 그 이후에도 죽지 않는 영혼의 복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다.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영혼의 복을 받는 것이 최고의 복과 선물을 받고 누리는 유일한 길이 된다.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도, 마지막 영혼의 복을 좌우하는 장례식 화단의 빨간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진짜 허무해지는 것이다. 다시 만날 소망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해줄 위로도 전무해지기 때문이다.

 

영혼의 회복, 세상의 변혁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영혼의 복을 받고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책임져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을 듣고 전하는 것이다. 나의 영혼이 복음으로 인해 부요하여지고, 내가 전하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으로 인해 타인의 생명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영혼이 잘되는 복을 생략한 채 인생의 목숨과 생명을 풍성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영혼의 관점과 복을 깨닫지 못한 채 세상에 대해 당당하게 믿음을 선포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길은 없다.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건강할 것이라.’ 

복음이 담긴 작품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 미우라 아야꼬라는 위대한 작가의 첫 출발도 그의 영혼의 깨어남에서부터였다. 그 영혼이 주님의 복음으로 깨어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엄청난 영적 영향력과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였지만 그의 첫 시작은 매일 매일을 폐질환으로 각혈하며 내일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폐병 상태였는데 그런 낙심할만한 상황에서 그를 깨운 것은 젊은 청년 전도자였다. 예수님으로 인해 영혼의 부요함을 경험했던 한 청년이, 곧 죽어가는 생명 속에 있는 영혼을 바라보며 그 영혼을 다시 살라고, 그 영혼이 복음의 불꽃이 되게 한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중략)” 이 시를 읽으면서 새롭게 영감을 얻어 적어보았다. “한 사람이 교회에 처음 발걸음 하는 것은 / 천하보다 귀한 그 영혼 붙드시고/ 주님 친히 방문(訪問)오시는 순간입니다. / 한 사람이 오는 것은 한 인생이 통째로 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생명, 한 영혼.

 

생명, 목숨, 영혼

 

한 사람의 인생은 그저 의식주가 유복하여 질 좋은 환경에 산다고 절로 훌륭하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고급스런 집과 차, 많은 지식과 명성, 그런 것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주의 교회를 혼돈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한 가지 더 곁가지로 붙어있는 악세사리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타락시키고 물들게 하며 온전히 거듭나지 못한 영혼의 모습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최고의 복이 무엇인가? 나의 인생, 목숨과 생명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나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서 깨어나야 한다. 나의 영혼이 생기와 복을 얻어야 한다. 그 영혼의 넘치는 감격은 또 다른 사람의 영혼에 마음이 가도록 이끌어갈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영혼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될 것이다. 잠든 영혼이 깨어나고 살아나는 그때에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더욱 힘 있게 펼쳐지고, 세상을 바꾸는 변혁의 일들이 불꽃처럼 타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영혼과 뭇 사람들의 영혼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들은 장차 땅의 목숨과 생명이 다하는 그날에 그가 받을 영광의 면류관을 생각하는 많은 남겨진 이들의 눈에 그의 이름과 함께 놓여진 장례단 빨간 십자가를 더욱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빛나게 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6.0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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