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세상과 영혼의 존귀함

- 육체와 영혼, 말씀과 교회
전남수 목사

대장부의 마음

 

다윗 왕이 죽을 날이 임박하여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라고 말하며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긴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다해 자신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때에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을 생각하며, 가장 삶에 대해 진실할 수밖에 없는 그 때에 유언을 남긴다. 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그렇게 사랑하며 돌보았던 자기 백성들을 그의 손에 맡기며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첫 마디가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다. 원문에서는 ‘너는 강한 자가 되어라, 그리고 남자가 되어라’는 뜻을 드러낸다. 남녀의 차별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남녀의 구별적인 의미가운데 남자에게 요구되는 특성으로서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다. 

강하다는 것과 남자라는 의미가 중첩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한마디로 ‘강해라, 정말 강한 사람이 되어라’는 뜻이다, 다윗 자신의 평범하지 않는 삶,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신과 배반과 생사를 넘나드는 일들을 겪으며, 그렇게 결론되어진 말을 내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다윗에게 뿐 아니라 성경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자녀같이 사랑하는 그 사명의 후계자들에게 주는 말이다. 모세는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가장 귀한 사명 앞에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강권했었다.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은혜 속에서 강한 주의 군사가 되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할 것을 말씀하셨던 흔적이 있다.

 

말씀을 지키는 순전한 마음

 

그렇게 다윗이 대장부의 마음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어지는 유언과 연결해보면 뜻이 분명하다. 다름 아니라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네가 형통할 것이다’는 말씀이었다. 오직 여호와의 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다윗에게 사나이다움은 무엇인가? 대장부가 누구인가? 남자다움이 무엇인가? 힘세고 튼튼하고, 가슴에 털도 있고, 야심만만하고, 배짱 있는 사람인가? 

그런 외형적인 것을 말함이 아니다. 다윗에게 강하고 담대함의 용도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지키고 살려는 태도와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죽도록 순종하고 지킬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진짜 사나이 대장부임을 말하는 것이다. 내면의 심지가 강하고 견고하여서, 무엇을 하든지 말씀에 굳게 서서 말씀대로 행하며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 다윗의 외모는 사무엘이나 그의 가족 부모형제마저도 인정할 만한 지도자의 외형이 아니었다. 성경의 영감으로 만들어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에게 외모는 관심 밖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 그를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무엇이 가장 대장부 사나이다우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광야의 시와 노래를 통해 능히 짐작이 된다. 상황과 환경을 핑계치 아니하고 마음중심에서부터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윗은 그런 삶을 살기위해 몸부림을 쳤다. 시편 119편 60절을 보면 다윗은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노라고 고백한다. 시편 119편 101절에는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다고도 고백한다. 그렇게 세상 앞에서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그의 순전한 신앙이, 마침내 그를 대장부이면서도 아름답고 흡족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릴 수 있었고, 그러한 과정에서의 맛보아 경험하였던 아름다운 영적고백들을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 솔로몬에게도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속 영혼의 존귀함

 

광야를 쫓겨 다니며 그는 복마전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런 세상살이에는 유혹과 좌절이 많다. 그런 세상에서 그를 붙들어준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울과 같은 인생을 한칼에 죽일 수 있었지만, 그는 두 번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해할 수 없다는 그 말씀의 교훈에 충실하였다. 그렇게 자신의 상황과 형편보다 말씀대로 순종함을 통하여, 그는 세상 사람들 보다 더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전혀 결이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다윗 자신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었다. 

고생하는 부하 장수들의 청을 따라 얼마든지 쉽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왕도 제거할 수 있었지만, 성경과 다른 급격한 상황윤리에 자신을 방임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말씀에 순종하였고 이것이 그의 영혼을 존귀하게 만들었다. 그 영혼의 존귀함을 하나님이 인정하셨고 그를 따르던 부하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대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선명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만약 다윗이 이러한 상황에서 부하들의 행위를 방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순간적인 자유와 해방은 맛볼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역시도 자신의 왕권에 칼을 들이대는 부하들을 보게 되었을 런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앞에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과 해석을 다 제거하는 다윗 앞에서,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든 유익을 내려놓고 딱 멈춰서는 대장 다윗을 보면서 부하들도 다윗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섬기는 것임을 알고서, 자신들의 위치가 그저 먹고 살기위해 모여든 억울하고 마음 상한 세상의 버려진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말씀공동체의 존귀한 멤버임을 생각하며 저들 공동체도 새로워졌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영적지도자에게서 왜 그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적권위들을 볼 수 없을까? 세상의 악함과 종말시대 성도들의 불신앙을 탓하기 전에 과연 교회나 목회자가 무엇으로 그 준거를 삼아 삶의 방향과 목양일념을 실천하는 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고 따르고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며 그에게 그럴만한 영적권위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말씀순종과 형통의 근거

 

그렇다면 왜 말씀에 대한 강한 순종이 삶의 형통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에 연유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만드셨다. 이처럼 사람이란 존재는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육체를 가진 인생은 항상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몸을 위해 공급되는 여러 가지 의식주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신 불신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늘 ‘먹고 살기 바쁘다’는 말로서 자신의 육체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한 가지를 더 생각한다. 성경대로 믿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호흡으로 만들어진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돈이 최고다, 인생살이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라며, 그렇게 허무적으로 이야기해도 절대 동의할 수가 없다. 사람은 결코 세상의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이 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지으신 사람은 육체의 떡만으로 살 수 없고, 영혼의 양식을 필요로 한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며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산다. 영혼도 배부르게 먹어야 산다. 그 영혼이 원하는 양식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영혼의 양식인 그 말씀을 먹을 때 그 인생은 비로소 생기 넘치는 인생을 살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날 때 육신의 것만 구하는 인생을 보라. 반드시 그 영혼이 병들고 아파하게 된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먼저 구하면서, 영적인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영혼의 잘됨과 같이 범사에 형통하고 생기 넘치는 복도 허락해주시는 것이다. 40년 광야세상을 거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결론이면서, 모든 오고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과 교회에 붙들린 복

 

12월 연말,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목사인 나에게 제일 큰 복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평생 교회에 붙들려 사는 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에 붙들려 뭘 하길래? 말씀연구에 붙들리고, 예배자리에 붙들리고, 말씀과 함께 몸부림치지 않으면 도무지 깨닫지 못했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감격하고, 이전에 제대로 말씀전하지 못하였음에 회개하고, 그렇게 이런 저런 과정을 지나도록 교회에 붙잡아 주신 것이 근본적인 복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코를 꿰어 붙잡아 두신 것에 감사하게 된다.

붙들리지 않으면 자기마음대로 하는 인생, 자기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되고 만다. 결코 열매가 좋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붙들리고, 말씀에 붙들리고, 교회에 붙들린 사람, 그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성도는 주일성수할 자유를 달라고, 예배드릴 자유를 달라고 긴장하며 사장님과 투쟁을 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이 코로나 시국에 왜 교회에 붙들어 매려고 하느냐? 하면서 저항의 자유를 꿈꾸는 신앙도 있음을 본다. 은혜 받음의 차이이지만 안타까운 상황이다. 코로나가 대수일까?

 

예수님, 교회, 말씀 

 

예수님께 붙잡히고, 교회에 붙잡히고, 말씀과 사명에 붙잡히는 복을 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는 인생은 결국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마침내 공동체의 화평을 깨고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말한다. 너의 인생 사나이답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온전히 말씀에 붙잡힌 인생이 되어라. 왕이 되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너는 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리더인 네가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힐 때, 너의 나라가 형통하고 평안할 것이다. 이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가르친다. 

어찌 솔로몬뿐이겠는가? 시대를 뛰어넘어, 거친 사막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당부하신다. 교회의 리더인 주의 종들에게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입을 통해 권고하신다.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혀라. 말씀에 붙들려라. 교회에 매여 살아라. 너에게 세상을 이기는 믿음, 형통, 평안을 허락하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12.12.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