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세상, 아름다운 영혼

- 하나님의 이름, 영광, 사필귀정
전남수 목사

배운 대로, 지키는 대로

 

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를 할 때의 기억이다. 장교들은 여러 출신들이 함께 BOQ 생활을 하게 되는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육사출신 장교들의 생활모습이었다. 모든 육사출신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함께 근무했던 선임 장교는 여타 출신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겨울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영하 20도를 오가는 금학산을 뛰어 오르지를 않나, 겨울에 고양이 세수에 급급한 이들과 달리 냉수마찰을 하는 등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출근길에 겨우 눈을 뜨고 오가는 중에 그와 눈을 마주치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다르네, 확실히 별 달겠구나!’ 육사 4년 동안 배우던 것을 현실 부대에서도 동일하게 자신의 삶을 지키고 가꾸는 데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참 멋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이처럼 일반 세상에서도 배운 대로 행하고, 지킬 것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통교회와 신앙의 컬러가 다르지만 예전 펜실베이니아주 랑케스트의 아미쉬 마을사람들이 보여준 행동들도 아름다운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기억들이다. 어느 날 마을 학교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는데, 찰스 로버트라는 사람이 아이들 학교에 총을 난사해서 10명의 아이가 죽고 다쳤고 범인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이 난리가 났었다. 그 이유는 전기도 사용하지 않고 농사 등을 주로 하며 살아가는 철저한 평화주의자들의 마을에도 총기사고가 발생했다면 미국은 도대체 어디가 안전한가에 대한 문제점을 던져준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사고 이후의 아미쉬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들이었다. 자기들의 인척들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장을 잃고 남은 두 딸과 함께 죄인의 가정으로 낙인찍힐 범인의 집을 방문하고 위로한 것이다. 또한 그의 장례식의 조문객의 반 이상이 아미쉬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 중에서 범인의 가족에게도 똑같은 비율로 전달이 되게 한 것이다. 저들의 마음에도 보통의 감정, 분노가 함께 존재하였을 것인데, 저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존귀함을 세상 앞에 증명한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구닥다리 폐쇄주의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배운 대로,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들, 상식을 법을 따라 규모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윗, 아름다운 사람

 

성경은 다윗을 향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증거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대표적인 사건이 엔게디 황무지 동굴사건이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찾아온 사울이 용변을 위해 굴로 들어갔다. 그곳은 석회암 동굴들이 많은 곳인데, 어떤 굴들은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들어갈 수 있는 큰 굴들이었다. 사울의 용변 보는 곳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곳에 박쥐처럼 숨어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무장 해제된 사울을 죽이고, 더 이상 도망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될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다윗의 사람들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아니하고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는 것으로도 마음이 찔리는 아픔을 느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다윗은 자기 눈앞에서 자신의 고생을 끝내고, 유익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더불어 이것은 자애매한 살인이 아니었다. 저들의 표현으로는 먼저 애매한 죽음을 요구한 사울에 대한 정당방위이며, 이런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영적조언도 뒷받침 되었다. 그와 함께하는 참모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은 사울이 더 이상 왕이 아니라 미래의 왕은 다윗 자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사울이 왕으로서 한 일이 무엇인가? 그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제사장과 그 가족과 아이들 85명을 죽이고, 애매한 지역사람들까지 희생양으로 만든 사람이 아닌가? 그는 마땅히 탄핵되어야 하고, 다윗 개인의 원수를 떠나 하나님의 사람을 해친 그는,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하여도 아무런 정당성에 금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들 속에서 맞닥뜨리는 그 어떤 유익과 정당성보다 더 강력하게 자신의 행위를 붙들어 매는 힘에 지배를 받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all stop시키고 모든 상황판단을 멈추게 만드는 힘에 붙들린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품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 그의 영혼에 임재하신 성령의 강권하신 은혜가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사울왕이 아무리 엉터리, 방탱이 같은 존재라 하여도 그를 세우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여호와 하나님의 그 권위와 그 이름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전제 앞에서 다윗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당성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참모들의 조언 등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행위를 결정하게 만드는 그 영혼이 품은 내용물,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믿음과 신앙과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무엇이 우리 인생의 진퇴를 결정하는 준거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그의 영광이다. 

세상이 아무리 삶을 뿌리 채 흔들고 아프게 하여도, 그래서 세상 때문에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여도, 우리는 결코 쉽게 마음을 세상에 내어주지 않아야 한다. 거친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영혼의 존귀함을 지키는 길이 된다. 세상이 요구하는 광야의 들짐승 같은 약육강식의 생존법을 거부하고, 말씀에 대한 영적 더듬이를 예민하게 제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혼을 세상에 매매하지 않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를 보시기를 원하신다.

 

삶의 경영원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나의 삶을 경영하는 원칙이 무엇인가? 나를 가게도하고 멈추게도 하는(Go & Stop)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것이 자신의 영혼의 가치를 증명하는 기준이 된다. 교회가 10만평 수양관과 묘지를 매입할 때이다. 한국 서울의 대형교회 집사님 부부가 불치병을 고치러 오셨다가 도네이션을 해서 만들어진 장소인데, 그 일의 시작배경이 아주 특별했다. 이곳 식당에서 일하시던 분이 타주에서 현재월급의 100불을 더 준다고 하니 미련 없이 칼(?)을 접는 것을 본 충격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칼을 접는다는 말은 요리사가 자기 도구를 챙긴다는 뜻이다. 

자신의 영혼과 신앙은 무엇인지, 섬기는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할 사명에 따라 오고가는 것과 멈추는 것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결국 그 영혼의 가치선택 기준은 참 허망한 것이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이민자들이 돈 따라, 형편 따라 미국 50개주를 다 살아보려면 1년마다 이사를 해야 할 것이고, 결국은 떠돌이 방랑인생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이곳 알칸사를 나의 홈타운으로 생각하고, 부초 같은 떠돌이 인생이 되지 않도록 묘자리를 만들자고 주창하던 때에, 그 말씀에 은혜를 받은 방문객이 헌납한 결과가 수양관과 묘지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결과요, 열매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스스로 지키는 존귀함

 

다윗에게 사울은 복수가 마땅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내용물에는 ‘주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해할 수 없다’는 말씀이 있었다. 다윗은 오직 그 말씀에 자신을 붙들어 맴으로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존귀한 인생이 되도록 한 것이다. 나의 삶의 기준이 주님, 주님의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아무리 거친 세상을 산다하여도 그 삶의 존귀함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여집사님이 집안경제에 어려움이 생겨서 세상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할 수 있는 게 살림뿐이어서 가사도우미, 파출부 가정부 일을 시작했다. 처음 하는 세상일이라서 사장과 출입하는 집 주인들과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때 이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한 말씀을 주시더라는 것이다. “주께 하듯 하여라.” 그때부터 이 여집사님은 직장의 주인인 사장님에게도 말씀 순종하여 주인님, 주님처럼 대하고, 일하는 곳에서 만나는 집주인에게도 말씀순종해서 주께 하듯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주께 하듯 하며 얼굴에 인상 쓰고, 집안에 우환 있는 사람처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자연히 웃고 환하고 밝은 얼굴로 모든 이들을 대하고, 예수의 향기가 나타나고, 훗날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자리에 서고, 하나님의 은혜의 간증스토리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분이 받은 말씀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자신은 여전히 비천하고 못났으며, 연약한 무지랭이 인생이고, 자신의 하는 일도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천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주인이 그리스도가 되고, 주의 말씀이 그 심령을 지배하고 사니까, 그리스도가 계신 곳, 즉 그리스도가 주인 된 사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가 자신의 얼굴과 삶을 마침내 존귀하게 만들어 버리더라는 것이다.

 

사필귀정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모인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는 간절한 기도와 최선의 열심을 다해 나아가고, 현실목회현장에서는 그런 간절함이 없이 대충 세끼 집밥처럼 한다면 하나님의 책망거리밖에는 남을 게 없는 삯군이 되는 것이다. 존귀한 주의 종이, 세상 것에 마음 팔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가치를 스스로 내어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작은 수의 성도들과 작은 시골에서 목회하는 것, 비록 작고 초라해 보여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땀과 눈물과 정성을 드릴 수 있다면 그 목회자는 화려한 조명아래 박수 받으며 목회하는 그 어떤 목회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다윗은 아둘람 거지들의 두목과 같으며 동굴 속에 박쥐처럼 숨어 살아야하는 도망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의 영혼이 말씀에 붙들리고 순종하게 됨으로 그는 세상이 범접할 수 없는 보석같이 존귀한 모습으로 빚어지게 되었다. 사람의 아름다움, 영혼의 존귀함은 좋고 나쁜 환경의 유무에 있지 않다. 

거짓과 변개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이들이 많다. 결국은 사필귀정(事必歸正)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더욱 순결한 주의 말씀으로 무장하며 자신의 영혼의 순전함을 지킴으로,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 앞에서 존귀한 영혼의 삶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9.1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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