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삶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악역으로 등장하는 사울이다. 영화나 드라마라고 한다면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감탄할 정도로 집요하게 온갖 상황연기를 잘 소화한다. 딸의 사랑하는 사위를 죽여야 하는 비련의 역할부터, 영적으로 업앤다운을 거듭하는 신령스런 연기까지 해야 한다. 아마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 시상을 한다면 최고의 배우상을 받을 만한 다양한 역할극의 주인공이 사울이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은 허구가 아닌 실존인물의 기록이기에 너무 아쉽고 허망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는 원래 주인공 다윗보다 훨씬 더 훌륭한 조건을 가졌던 사람이었는데, 한번 지나가는 인생을 악역으로 마무리한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게다가 의롭고 훌륭한 아들 요나단으로부터 무고한 죄를 범치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한결같이 악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본다. 원래 성령을 알았던 사람이었으니, 한결같은 성령의 사람으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반대로 한결같이 악을 행하며 세 아들과 함께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관점(View Point)
사울의 근본적인 잘못이 무엇인가? 안경을 잘못 썼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안경을 잘못 쓴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안경이 무엇인가? 비유컨대 View Point,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이 잘못되었다. 그를 처음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름 부으셨던 하나님도 동일하시고, 왕으로서의 삶도 변함이 없고, 아들과 딸도 멀쩡한데, 사울 그 자신만 색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파란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파랗고, 빨간색 안경을 쓰면 세상이 빨갛게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모든 것이 자신이 가진 관점에 따라 세상을 달리 보이게 되는 것이다.
사울도 항변할만하다. 백성들이 저렇게 비교급으로 신하보다 못하게 왕인 나를 바닥에 내던질 수 있는가?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다윗은 역적이 되고도 남지 않은가? 게다가 순해 빠진 요나단에 의해서는 도저히 왕의 자리를 넘겨줄 수 없으니,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무엇보다 왕의 자리에서 내가 내 뜻대로 하겠다는 데 문제될 것이 있는가? 이미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음에도, 현실의 그가 하나님이 친히 기름 부으신 왕인 이상은 그를 막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존재와 인식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해석하는 마르크스 철학은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즉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적 명제가 이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의 원천이고 기초이며,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반영이며 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해당 사회가 인간의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 내 생각을 좌우한다는 마르크스 철학의 기초적인 명제인 셈이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명제이다. 그런데 이 심오한 철학도 때로는 사람이 가지는 관점에 따라, 자신의 인간적인 책임과 잘못을 회피하는 것에 사용되기도 한다. 지식층에서 교묘히 이용하는 한 방법이다. 최근 한국의 조국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강남좌파의 강남성(강남성향)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자신을 변호한 적이 있다. 본인의 가족들이 속이고 거짓으로 행한 부정한 일들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고려대 강수돌 교수가 지은 책 ‘경쟁공화국’에 언급되는 대한민국의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 관행으로 하던 일들의 패턴을 자신도 모르게 따랐다는 것이다. 자신은 권력구조개편과 학문연구라는 고급진 일에 전념하다보니 자신의 생각은 여전히 괜찮은 수준에서 움직이는 데, 경쟁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이 사회적 존재라는 한계가 이렇게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단한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는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보다는 전이(轉移) 혹은 투사(投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급스런 남 탓, 보이지 않는 핑계에 가름하는 것이다.
그때 그가 사용한 말이 ‘강남성’이라는 말이다. 통칭하여 강남좌파라는 이름도 연결된다. 생각은 좌파의 꽤 진보적인 신선함을 가졌는데, 그런데 가만히 보니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제 삶은 강남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의식이나 생각은 괜찮게 하는데, 몸이 강남에 있다 보니 강남 사는 사람들의 특징을 경쟁공화국 속에서 나타낼 수밖에 없더라는 항변이다. 한마디로 내 탓이 아니다. 사회나 국가가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이다.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강남이 아닌 태평양 작은 섬에서 나고 자라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전부인 사람이 그의 경험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충분히 자신의 방식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관점
조국 씨의 굉장한 설득력 있는 말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질문해야 한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으로 가져와서 생각해서 과연 합당한 말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성경은 이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상황과 조건으로 규정되는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의 영적변화를 통해 오히려 주변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말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의 변화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달라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 싫어하는 것 나도 싫어하는 수준까지 바라보고 가는 것이다.
관점이 바뀌면 변화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이나 고통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럴 것을 왜 신앙생활을 하냐고 묻는다. 예수 잘 믿는 당신의 삶에도 이렇게 고통이 많다면 내가 신앙이 좋아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 항변한다. 아직 관점이 바뀌지 않아서 그렇다. 동일한 고통과 고난이지만 삶속에서 해석된 관점을 가진 자들은 여유롭다. 이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그대로인데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바꾸어져서, 고통과 고난 중에도 감사하게 되고 날마다 더욱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감사할 조건과 환경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한다. 범사에 감사했더니 더 많은 감사의 내용을 허락해주신다. 기도할 조건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로 기도하라고 해서 어려움 중에도 기도했더니 염려가 사라지고 찬양이 흘러나온다. 기뻐할 조건이 되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안경을 바꾸어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더니 행복한 마음에 즐거움이 배가 되어진다. 용서해야지, 사랑해야지, 도와야지하고 결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식(認識)하는 것, 성령의 사람으로 속사람의 생각이 변하면 그 열매는 자연히 용서와 사랑과 성령의 열매들이 되는 것이다.
거룩과 회복, 의지
또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존재이기에 항상 거룩과 회복을 지향하게 된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 인생은 새로운 삶(New Life)을 향해 새 출발하게 되는 환희를 경험한다. 그래서 참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그러려니, 어쩔 수 없구나’에 머물지 않는다. 참된 신앙, 참된 믿음, 참된 은혜의 관점으로 거룩과 회복을 바라보며 변화를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정해진 틀과 환경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성령 안에서 새로운 은혜를 구하고 바라게 된다. 은혜 받은 사람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이 감동되거나 성령이 그 마음을 만지실 때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들여다본다. 어두운 촛불아래 보던 것이 믿음이 깊어지고 성령이 충만할수록 밝은 조명아래 자신을 바라본다. 예전의 죄악과 허물진 것, 남을 탓하며 세상을 핑계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간절해진다.
돼지우리 같은 구질구질한 삶의 모습과 환경을 견뎌하지 못한다. 비단 눈에 보이는 환경만이 아니다, 자신의 모난 성품과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결코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결코 사치하지 않아도 항상 깨끗하고 밝고 더 아름다운 것을 본다.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도 영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창고에 불을 켜면 바퀴벌레가 본능적으로 어둠속으로 도피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 일반은총과 상식
사울 같은 사람들이 참 많다. 조국스런 존재들이 참 많다.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신과 배반을 일삼는 이들이 많다. 해외동포인 우리들을 포함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백선엽 장군 같은 이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특히 국가의 지도자인 대통령과 정부 여당과 야당 및 이들과 함께 정치적 유익을 누리고 사는 이들은 당신들의 눈앞에 보이는 불로소득 집값에만 흥분할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룬 이들의 희생의 기초 위에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대통령은 백선엽 장군이 보수 우파만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듯이, 자신을 지지하는 좌파 진영의 눈치만 보기에 앞서 좌우 진영의 모든 국민들의 지도자로 처신해야 할 것이다.
두려움으로 기도
사람들이 너무 자신의 안경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보편적 인생들에게는 은혜가 아니면 일반은총의 상식과 건전한 관점을 주었건만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개 돼지 같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하였는데,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기도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사울같이 하나님이 왕관을 씌워준 목적에 어긋나게 행한 것처럼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주셨는데, 내가 사울이나 그와 같은 부류 중에 한명은 아닐는지, 말과 설교는 목사처럼 하는데 삶의 실천과 순종은 괴리된 채로 멀어진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에, 무릎을 꿇음으로 기도를 먼저 시작한다.
두 번째 이유는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마음의 간절함이 기도하게 한다. 깨닫지 못하는 존재가 깨닫게 되는 경우를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국 나타나는 결과 외에는 증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다니엘처럼,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를 바라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더욱 기도드린다.
davidnjeon@yahoo.com
08.2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