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복지,“하나님나라의 복음”관점에서 포괄적 이해해야
장애인 위한 제도와 법 바꾸는 것도 장애인 복지의 한 부분
4. 장애인 선교인가? 장애인 복지인가?
일반적으로 선교는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복지는 영혼을 구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부분을 도와주는 것으로서 복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너무 칭의적으로 해석한데에 따른 편협한 이해이다. 그 좁은 이해는 복음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부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구원은 “고통의 사탄의 나라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사랑의 하나님 나라로 옮겨와 신적인 생명(영생)을 영혼과 육체로 풍성히 누리는 것” 즉 “모든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임을 알 때 예수님은 영혼만 고난에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도 고난에서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 복지에 힘쓰는 것도 선교의 한 부분이지 선교와 관계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이 복지를 하는 것을 선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로 그들의 주권을 전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예수를 주로 믿어 하나님 나라로 이미 주권의 전이를 한 사람들이다. 이런 크리스천들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를 구주로 믿어 지금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누리라고 전하는 것도 선교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의 물질적인 고난을 해결해주는 것 또한 행동으로 하는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를 갔던 새물교회 성도들이 좋은 예이다. 그들은 말로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치료(복지)하고 유치원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의 이름도 샘물선교단이 아니고 “샘물봉사단”이었다. 그런데 왜 이슬람교 탈레반들은 그들이 선교행위를 했다고 그들을 납치하고 또 목사와 청년 성도를 죽였는가? 그것은 그들이 목사와 성도들이 봉사(복지)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선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복지는 선교라고 말할 수 있다. 말로 전하고 책상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만이 선교라고 하는 편협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말로 하는 선교뿐 아니라 크리스천의 복지 행위를 통해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예수를 영접하기도 한다.
현대는 말이 너무 무성하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증거는 많지 않기 때문에 말로 하는 선교보다는 행동으로(복지로) 예수의 구주되심과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많은 불신자들이 말로 전도하는 것을 공격적 선교방법이라며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말로 하는 선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복지를 선교가 아니다 라고 평가 절하하지 말자는 것이다. 오히려 이 시대는 복지를 통한 선교야말로 효과적인 선교 방법일 수 있다. 예수님도 병든 자, 가난한 자, 장애인들을 고쳐주시고 친구 되어주셔서(복지)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했다.
우리가 말로 예수님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선교이고, 육체적 복지를 힘쓰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데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바울과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결과일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영혼의 고통(죄)과 육신의 고통(병, 장애, 가난, 사회적 차별 등) 두 가지 모두를 구원하는 포괄적인 복음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하시면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바울 서신서의 대부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사용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대개 예수의 메시아 되심, 아들 되심, 의롭다함을 추상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왜 이론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사도들이 선포했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예수가 완성했다고 하는 논리적이며 이론적인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은 결국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와 복지를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인들을 위한 제도와 법을 만드는 데도 힘써야 할 것이다.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면 먼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죄 용서함을 받고 주권의 전이를 해야 한다(개인구원), 이것은 기본적인 첫 번째 단계이다.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신적 생명(영생)을 누리며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통치가 온 세상에 퍼지게 하려 함이다(사회구원). 그러므로 개인의 회심과 믿음을 중요시하지 않는 민중 신학, 해방신학 등등은 용어는 성경적 용어를 쓰지만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육신적 메시아사상이나 사이비 종교인 공산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사탄의 영향력은 예수를 영접하여 성령을 힘입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반대로 개인의 회심과 믿음은 중요시 하지만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문제를 무시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성령님을 힘입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자연환경에까지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바른 복음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모두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장애인 전도를 통한 개인구원뿐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제도와 법을 바꾸는 노력도 힘써야 한다.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도 복지의 한 부분이다.
03.0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