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를 왜 연구하는가?

정부홍 박사

(에드워즈대학교 총장, 예일대 에드워즈센터 상임연구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 대륙 매사추세츠 필리머스에 1620년에 도착한 이후 약 80년이 지났을 무렵, 1703년에 코네티컷 하드포트로부터 약 10마일 위에 위치한 이스터 윈즈에 태어나서, 영국으로부터 뉴잉글랜드(13개주로 된 신영국)가 1776년에 독립하여 미국을 건국하기 약 20년 전까지 살았던 인물로서 예일대 교수, 노스앰톤교회 목사, 스탁브릿지 인디안 선교사, 그리고 프린스턴대학 학장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사후에는 그를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대각성 설교자, 신학자, 철학자, 윤리학자, 그리고 심리학자였다고 평가한다.  

 

에드워즈에 대한 찬사

 

에드워즈에 대한 찬사가 엄청 많은데 그 중 일부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그의 책을 요약하고 개작하여 자기 사상에 맞추어 출간했던 감리교 창설자 존 웨슬리는 “심히 착하고 지혜로우며 위대한 분이시다.” 

또 웨슬리의 대학친구였으나 교리적으로 논적이었으며 1740년 10월에 뉴잉글랜드로 순례 설교하러 왔을 때 에드워즈의 초대를 받아 교회에서 설교하며 에드워즈 집에 묵었던 조지 휫필드는 “그는 견고하고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며,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다.” 

에드워즈 집에서 숙식을 하며 목회수련을 쌓았던 사무엘 홉킨스는 “현세 인간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겸손하고 가장 경건한 사람이다.” 

프린스턴대학 4대 학장이요 에드워즈 자신의 후임 학장이었던 사무엘 데이비스는 동시대를 살면서 “미국이 배출한(America ever produced) 가장 심오한 사상가이며,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지난 20세기 중엽에 에드워즈 연구에 불을 질렀던 하바드대의 지성사 교수였던 페리 밀러도, “미국이 생산한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의 가장 유명한 영국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은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은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요즘은 자유주의 물결로 인하여 다소 주춤해졌으나 많은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고급영어과목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든 죄인들”이란 설교문을 읽고 분석하거나 연극을 하기도 하며, 대학교에서는 미국철학 및 윤리 그리고 역사 과목에서 많이 읽고 리포트 쓰는 것이 에드워즈란 인물이다. 

사실 필자는 이런 사실들과 평가들을 전혀 모른 채 1986년 대학 3년 때 필독서여서 읽게 되었는데, 바로 그 책이 에드워즈가 목회했던 하드포드에서 차로 1시간가량 쭉 올라가면 나오는, 매사추세츠 주의 노스앰톤 마을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변화 받고 회개하는 사건을 기록한 “놀라운 회심이야기(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정부홍 역, 기독교문서: 1997)”이라는 작은 책이었다. 이 책 서문에서 다음같이 저의 소회를 남겼다: 

“나는 이 책을 10회 이상 읽었다. 이 책은 영적 대각성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내 뇌리에게서, 아니 내 영혼에서 지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이 되게 했다. 본서에 소개된 회심 장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몸에서 전율이 흐르고 떨려 한여름에도 추위를 탈 정도이다. 그리고 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게 되고 내 자신은 과연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하였는가 자문해 볼 수 있었다.” 

저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난 300년간 뉴잉글랜드를 넘어 현재는 아시아인들에게까지 그의 남긴 글들을 하여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로 한국에서는 1984년에 처음으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윤기향 역)”과 “사랑과 그 열매()”이 번역 소개되었고, 저도 본격적으로 에드워즈를 소개하고자 1996년에 한글 최초의 전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를 내어 20여년전 에드워즈 관련서적이 전무할 때 많은 이들이 참고로 하고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에 보면 서둘러 낸 것이라 조악하다. 이처럼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비단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관심 대상만이 아니었다.  

 

그는 학문적인 두뇌에 있어서만 천재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 있어서도 영적 신동으로 성장하며 체험한 것이 

그의 위대한 삶의 바탕이 되었다. 

 

가정의 내력

 

에드워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좀 더 그 가정의 내력을 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증조부 윌리암 에드워즈는 런던에서 교구 목사였으나 전염병에 걸려 그의 아내와 아들 윌리엄을 남겨두고 죽은 다음 그 아내는 나무술통이나 용기를 만드는 기술자(cooper)랑 재혼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1640년경 코네티컷 주 하드포드로 이민을 온다. 

그 아들은 결혼하여 리차드를 낳았는데 장성하여 역시 쿠퍼이면서 장사를 하여 유력한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였는데 그 부인은 3개월 만에 바람을 피워 임신을 하고 아기는 그 친정에서 데려가 키웠으며, 그런 부정을 계속하고 감정이 폭발하여 어느 날 밤엔 남편을 칼로 죽이려 하기까지 하는 여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한 자매는 자기 아이를 살해하였으며 또 한 형제는 도끼로 자기 다른 자매를 죽이는 만행을 저질러 교수형을 당할 정도였다. 결국 그 부인과 이혼신청을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몇 년 후 다시 신청하여 허락받고 나중에 재혼하였다. 

어떻게 청교도 사회에서 이렇게 극악무도한 여자와 그런 사건이 있었으며, 더구나 그렇게 위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위대한 아버지 디모데가 태어나 성장하였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 비밀은 리차드 에드워즈의 장례식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조사를 아들 디모데가 읽었는데 그 속에서 부자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제 아버지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였습니다. …아버지는 누구나 사랑하며, 동정심이 많으셨습니다. …칭찬을 잘하시며 진실을 말했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다친 사람이나 억울한 사람의 편에서 도와드렸습니다. …그리하여 타운의 대부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에게 아주 부드럽게 대하시며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남편이셨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선한 아버지였을 뿐 아니라 집안의 하인들에게 그렇게 하여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낯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잘 기억합니다. 이제 작별하는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신앙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대강령을 충분히 분명하게 믿고 이해하셨습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믿고 선택하기로 하였을 아니라 기뻐하며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자의 성육신 교리와 그리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를 믿으셨습니다….”

극악무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디모데 에드워즈가 자애와 경건이 있는 아버지 사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가 나왔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가 그 당시에 하버드대학에서 아주 우수한 졸업생이 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까이 있는 이스터 윈저 마을의 초대목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63년간 목회하고 소천했다. 그의 어머니도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서, 당시 ‘코네티컷 계곡의 교황’이라 불릴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솔로몬 스타다드 목사의 딸이었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친가와 외가 모두 훌륭한 청교도 목회자 가정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 에드워즈는 11남매 가운데서 5번째로 그리고 독자로 태어나, 13세에 예일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아버지 디모데에게 학습을 받았는데, 그 당시 마을의 교사로 워낙 잘 가르쳐 소문이 하버드에까지 날 정도여서 그에게 배운 아이들은 묻지 않고 입학시켜 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에드워즈는 그 당시 가장 훌륭한 교사에게 사사를 받아 기초지식과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와 같은 고전어 배웠다. 그리고 집에서 어머니 에스더와 4명의 누나들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예일대학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어 20세에 석사학위를 받은 후 20-21세 때 뉴욕장로교회에서 8개월, 볼턴에서 6개월 동안 작은 교회에서 목회경험을 쌓은 후 아버지 디모데의 조언을 따라 21-23세(1724-1726)에 예일대의 교수로 초빙을 받고 뉴헤이븐으로 갔다. 거기에는 예일대 도서관이 있어 비치된 책들을 읽고 자기 관심분야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특히 아이작 뉴톤과 존 로크의 과학 철학 신학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이미 천재적인 소질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좋은 환경의 가정과 부모를 잘 만나고 또 어떤 천재성을 자신이 발휘하고, 그리고 명문학교를 거쳐 그런 특성이 그 개발되고 자기 전문분야에서 특출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위인들의 전형적인 전철일 것이다. 물론 에드워즈도 마찬가지로 그런 전철을 밟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 필자가 보는 또 다른 한 가지는 그를 다른 위인들 중의 위인으로 만든 한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바로 그것은 어릴 때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기 영혼에 대해 걱정하며 부흥과 회심을 경험하며 어떤 실천들을 했다는 것이다. 

훗날 자기 고백록(Personal Narrative)에 기록하기를, “나의 소년 시절, 대학에 가기 몇 년 전에 내 아버지의 회중들 사이에 큰 각성이 일어났는데 그때 나도 수개월 동안 감화를 받고 종교와 내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며 여러 가지 의무들을 행하였다. 하루에 5번씩 은밀한 기도를 하고, 다른 소년들과 함께 종교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만나곤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종교에서 알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기쁨을 경험하였다. …나는 친구들과 아주 멀리 떨어진 은밀한 숲속에 움막을 지었다. 그외 나만의 특별한 은밀한 장소들을 두고서 홀로 자주 은거하며 마음은 감화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영적 회심과 새로운 감각과 지식을 갖는 첫출발이었으며 이후에도 대학 가서도 계속 되었으며 졸업한 이듬해에 고향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대화의 시간을 나누는 1721년 여름에 완전한 회심을 경험하였노라고 고백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는 학문적인 두뇌에 있어서만 천재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 있어서도 영적 신동으로 성장하며 체험한 것이, 그의 위대한 삶의 바탕이 되었다.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

 

그 이후 그녀는 예일대 설립자 중 한 사람이요 뉴헤이븐교회의 목사였던 제임스 피에르폰트의 딸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했다. 그 당시로써는 일반적이지만 4세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형편상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에드워즈는 비범한 여자였던 것을 일찍부터 알아 차렸다. 4년간의 연애를 한 후 1727년 2월에는 자기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가 시무하시는 노스앰톤교회의 부목사로 안수 받고 7월에는 뉴헤이븐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2년 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담임목사로서 목회를 시작하며 큰 부흥을 1734년과 1740년에 두 차례 경험하였다. 그것이 미국교회사에 등장하는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서 소위 “미국영적대각성”이다. 

영국 청교도들이 미신대륙에 정착한 이후 100년 동안이 지날 때 이민 1세대들의 신앙심과 도덕성은 점차 쇠퇴하고 자유주의 신앙과 사상들이 만연하고 2,3세들도 그런 시류에 합류하여 신앙적 해이와 도덕적 타락이 창궐해가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허다하게 밤이면 쏘다니며 술집에 가고, 음란 행위에 빠져 미쳐 있었다…”고 에드워즈가 목격한 대로 기술했다. 

그때에 뉴저지 지역에서는 데오도르 프릴렝귀이젠 이라는 화란에서 이민온 목사께서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부흥회 사역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으며, 에드워즈도 기도하며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설교를 연속으로 하였을 때에 사람이 감화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또 휘필드 목사가 방문하여 설교함으로써 에드워즈가 시무하던 마을에서 큰 부흥의 불길이 점화되어 인근 지역으로 그리고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확대되어갔다. 

그때에 에드워즈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든 죄인들”이란 설교를 하며 여러 곳에서 부흥을 일으켰다. 급작스럽게 사람들이 변화되어 술집은 텅텅 비고 예배당은 구원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단기간 내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자들이 구원받았는지 자문하며, 불신자들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밤낮으로 근심하고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이런 회심과 회개와 부흥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의 삶과 종교와 정치와 문화 그리고 전 영역에 걸쳐서 새로운 변화를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올바른 설교자들과 지도자들이 요청되어 유명대학들 프린스톤(1746), 다트머스(1769), 브라운(1764), 콜롬비아(1754)가 이 시기에 설립되었으며 사회와 정치에 적극적 참여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교파 교회의 분열과 다양한 교파의 출현, 인디언 선교운동과 사회봉사와 노예해방운동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런 결과들은 미국 독립정신과 건국정신의 토대를 놓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흥의 불길은 희미하고 또 탈선하여갈 때 이미 화석화된 회중들은 22년간의 수고하며 대각성으로 인도했던 에드워즈를 1750년에 230 대 23이라는 불신임으로 해임시켜서 차로 한 시간 넘게 서쪽에 위치한 스탁브릿지 라는 인디언 마을에서 선교사 및 교사로 활동하며 그곳에서 중요한 걸작들 곧 “자유의지(1754, 새물결출판사, 2017)” “천지창조의 목적” 및 “덕의 참된 본성(탈고1757, 발행1765)” “원죄론(탈고1757, 발행1758)”을 마치고 1757년 12월 프린스톤대학의 학장으로 초빙 받고 3개월 만에 코로나 펜데믹으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목숨을 잃은 것처럼, 에드워즈도 그 당시의 전염병 천연두주사 부작용으로 소천하면서 다음 같이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에드워즈의 마지막 유언(Last Will)

“사랑하는 딸 루시(Lucy, 5th)야, 이제 잠시 후면 너를 떠나야 하는 것이 내게는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나의 가장 친근한 사랑을 전해다오. 우리 사이에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비상한 연합(uncommon Union)은 내가 믿기에 영적인 성격의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녀는 큰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따르기를 희망한다. 내 자녀들이여, 지금은 아비 없는 자로 남게 되지만 이 일이 너희 모두에게 너희를 영원히 버리시지 않는 하늘 아버지를 찾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내 장례식도 사위 아론 버러(에스더, 3th) 같이 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조그만 여분의 금전이라도 남게 될 터인데, 그것으로 자선 사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Timothy Edwards, "Some Things Written Concerning My Very Dear and Honored Father, Mr. Richard Edwards"(Short Version), RELife edited Family Writings and Related Documents, Ed. Jonathan Edwards Center. Works Online Vol. 41.

PeterBHjung@gmail.com

02.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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