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주님과 함께 (누가복음 24장 1-53절)

부활절 특집 설교 강기봉 목사(KAPC 전 총회장, 뉴욕백민교회 원로)

누가복음 24장은 인류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저자들 중 유일한 이방인인 누가는 헬라인들이 보는 인간관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을 볼 줄 알았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도 바울을 통해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 한 사람을 천하보다 소중히 대하시는 예수님을 배우며,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신 모습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인간미가 흐릅니다. 특히 마지막 장인 24장은 인간이 이르러야 할 마지막 단계 부활을 기록했는데, 무척 자연스럽고 쉬워 보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제자들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시며, 믿게 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부활을 믿도록 인도하심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는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향품을 예비하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자들로부터 시작됩니다. 무덤가에서 현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저희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마20:19). 즉시 열한 사도와 또 함께한 자들에게 달려가 알렸지만 허탄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달려가 보았으나 예수님을 가렸던 세마포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24:1-12).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여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 당하시고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을 때는 강하게 거부한 적이(마16:16-22)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베드로는 역시 다른 데가 있음이 보입니다. 

다음은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도우시는 장면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25리의 마을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로소 삶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일생을 예수님을 따라 살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불법자들의 손에 허망하게 죽임을 당해버린 것입니다. 너무도 허무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으나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모세와 및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가끔 ‘구약은 율법을 말하고 신약은 은혜를 말한다’는 말을 듣는데, 이것은 아주 편협된 이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함께 경험한 여호와이레(창22:14),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통해 나타난 일들이 부활을 내어다보게 합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과 엘리야, 그리고 엘리사도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왕하4;35), 자신은 죽어 뼈만 남았지만 전쟁으로 급해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 넣은 시체가 뼈에 닿자 살아난 일도 있습니다(왕하13:21).

 

2.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심

   

예수님은 엠마오의 두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사도와 또 함께한 자들을 대하십니다(24:33-43). 이 자리에 오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평강을 선포하십니다(24:36). 평강은 모세의 글에서만 20회 이상 쓰일 정도로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축복의 언어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각색 병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심으로 그들을 편안케 하셨습니다. 바다에 부는 거센 바람을 잔잔케 하심으로 삼킬 것 같이 넘실거리던 풍랑을 잔잔케 하심으로 편안케 하셨습니다. 스스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중풍병자의 육과 영을 고쳐 안심케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재자들은 자신들이 하던 생업을 그만 두고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편안함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어부 직을 버리고, 수입 좋은 세리 직을 뒤로 했는데도 심령은 만족스럽고 평안했습니다. 이런 제지들에게 부활하셔서 찾아오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를 선포하셨을 때 전혀 낯선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전에 맛보았던 바로 그 평안함이 되살아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은 허둥댑니다. 그만큼 부활은 육신 가운데 거하면서 인간이 붙잡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못 박히고 찢기운 손과 발을 만져 보게 하심으로 제자들로 믿게 도우십니다. 그 손과 발은 3년 동안 그들과 함께한 손과 발이었습니다. 체온도, 부드럽기도 같았습니다. 또 먹을 것을 청하셔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에예님의 잡수시는 모습은 제자들이 이미 많이 본 바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편안케 하시고 믿도록 하시려고 꼭 엄마처럼 형님처럼 대해주십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다시 영접하고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받들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뜻을 증거하며 살게 된 데는 예수님의 이런 자상하시고 따스한 보살핌의 덕분입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의 분부

 

저자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경을 거듭 말씀하시는 면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드디어 믿기 시작한 제자들에게 또 다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말씀들이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 초점은 제자들로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성경 말씀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마24:35).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은 구약을 말합니다. 예수님 생전에는 신약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상 적부터 성경을 읽고 기억하고 따라 살기를 힘썼습니다(신6:4-9). 그러나 그 성경을 예수님께로 적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 점이 사도 바울이 인생 전반부를 가말리엘의 율법 이해 수준에 매어 살아야 했던 이유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아라비아로 먼저 가서 3년간을 지내면서(갈1:17) 무엇을 했을까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약을 다시 읽고 또 읽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 원만한 추정이라 봅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 구약적인 배경을 예수님 중심으로 접목시키는 은사를 익혔을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중에 으뜸인 십계명을 바로 읽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마22:36-40), 레위기의 제사들을 통해 하나님 경외의 삶이 더욱 경건해지며 온전해 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모든 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큰 도로의 신호등은 파란 등보다 빨간 등이 훨씬 큽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제3일에 다시 사신 일을 전파하라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사역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을 기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고 그 피가 발려진 집의 장남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애굽에서 해방되도록 하신 역사가 모형이 된 것입니다. 

그 때 그 피를 발라 죽임을 면하고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건넌 자들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중다한 잡족도 함께 했습니다. 나이 85세에 아직 정복하지 못한 언약의 땅을 맡겨 달라 나선 갈렙 역시 그 ‘잡족’ 중 한 사람입니다(수14:6-12). 이것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대상은 ‘모든 족속’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지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과 육이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해야 정상이고 평안하고 만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땅에 있는 동안 풀어야 할 중대한 과제는 하나님을 조금씩이라도 더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크게 요동쳐야 했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혼자는 계시지 않도록 설계하셨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함께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세상 죄를 대신 지시게 하셨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어린 양들이 피를 흘림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의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 예수님이 유월절에 자기 피를 흘림으로 우리 죄를 깨끗하게 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같은 하나님이시자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피를 흘리게 하셔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심문하시고 뱀에게 저주를 퍼붓는 말씀 가운데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대개 이 말씀을 윈시복음이라 합니다. 여자와 뱀은 서로 적대감을 가질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 첫 아담이 범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새 아담(둘째 아담)은 사탄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머리를 부술 수가 있습니다. 사탄을 제어할 자는 사탄보다 더 강한 영적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탄의 머리를 부술 자는 여자의 후손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새 아담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여자가 잉태하여 낳습니다.                        

둘째는,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첫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난 사람들은 다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아담과 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홀로 풀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새로운 아담을 만드실 수도 있고, 하나님 자신이 새 아담이 되실 수도 있지만, 그것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새 아담으로 지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7:14), 그가 낳은 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사9:6-7). 또한 발꿈치를 물어뜯는 사탄의 공격으로 당하실 새 아담의 고난도 예언하셨습니다(사53장).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에서 그의 아들이 새 아담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마1:18-25, 눅1:26-38). 예수님은 새 아담이요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전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말씀과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이적을 행함으로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적 존재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아담의 죄값을 지시고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겨 내리고(눅23:45),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습니다(마27:51-53). 죄의 짐을 벗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자가 죽어야 했지만 이제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는 새 생명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우리에게는 부활의 주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된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믿음과 삶이 일치하게 사는 것입니다((행2:37). 새 하늘과 새 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앞에 바른 신앙고백을 하며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마16;16, 행9;20-23). 또한 예수님의 섬기는 삶을 본 받아 사는 것입니다(막10:45).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요, 우리 인생의 거대한 발판이 됩니다(롬13:14, 갈3:27, 엡4:24, 골3:10). 만일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고전15:19).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백성이 되고 세례를 베푸는 왕같은 제사장(벧전2:9)이 되고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하는 새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자가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삽니다(고전15:21-22). 

시대가 아무리 발전하고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듣던 처음 청취자들을 기준 삼아 말씀을 이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시대와 세상에 대하여 너무 민감하지 마십시다.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우리 삶을 통해 우리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남게 살아가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십시다. 할렐루야 아-멘!

kangkibong@hotmail.com

04.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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