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그린 선교교회)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책에서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일 수는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게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독일어로 Historie라고 하는데, ‘누군가가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지식, 경험적 내용을 보고하거나 전달하고 설명하기 위해 기록한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History라고 하는데, 그 말은 His+Story 즉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선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운행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가 나오는데, 완전히 새롭게 개혁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개혁되는 그 역사의 대변화의 중심에 누가 있을까요? 나다나엘 호손이 쓴 "큰 바위얼굴"에 나오는 것처럼 훌륭한 정치가나 위대한 장군이나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그 중심에는 놀랍게도 '한 갓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이신데 그 분이 탄생하신 날이 바로 즐거운 성탄절(Merry Christmas)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하심이 세계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을까요?
첫째로, 흑암을 광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1-2절).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본문의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당시 세계 패권은 앗시리아 제국이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멸망시켰습니다. 그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빼앗겼고, 고통과 흑암에 빠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종혼합정책까지 펴서 유일신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까지 황폐케 했습니다. 그런데 앗시리아는 그 여세를 몰아서 남유다까지 침공했는데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공항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고백했던 하박국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원군(援軍)을 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의지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이집트 밖에 없었는데 이집트조차도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도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운명은 거대한 폭풍 앞에 있는 연약한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이 멸망의 위기 앞에 있는 나라에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그것은 한 아기가 태어나서 빛을 비춰주겠다는 예언입니다. 이 아이는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사탄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흑암에 비추시는 참 빛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을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선명합니다. 즉, ‘어둠과 빛’을 대조하시는 것이지요(창1:2vs.1:3).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있게 된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흑암의 역사가 끝나고 광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흑암(호쉐크)은 죄와 무지와 고통을 상징하고 빛(오르)은 하나님의 현현과 생명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죄로 인한 고통 가운데 있는 백성들이 빛과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새 생명과 진리를 얻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3절).
예수님은 창성케 하시며 즐거움을 더해주시는 분이신데, 어느 정도의 기쁨을 주시는 분인가? 하면 ①추수하는 농부가 얻는 즐거움보다 더 승하게 하십니다. 농부들은 추수할 때에 가장 기뻐합니다. 그래서 풍년가도 있는 것이고, 농악대의 공연과 춤도 있는 것입니다. ②그런데 그것보다 더 기쁜 것은 탈취물을 나눌 때입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연습시킨 사병 318명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가 밤중에 기습공격을 함으로써 롯을 구출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서 감사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때나 탈취물을 나눌 때보다 더 기쁜 것은 ③전쟁에서 이겨서 압제로부터 해방될 때입니다. 4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여기 나오는 ‘무겁게 멘 멍에, 어깨의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는 노예들을 잔인하게 다룰 때 사용하는 고문 도구들입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미디안이란 나라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가서 13만5천명의 군사를 물리치고 해방시켰습니다. 그 때의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고백했는데(눅2:29), 그 말은 “지금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끔 너무나 기쁜 일을 만나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시므온도 너무나 기뻐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압제로부터, 죄의 구속으로부터, 사망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시는 것입니다(눅2:10).
셋째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셨습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5절). 군인들의 신발과 피 묻은 겉옷이 지푸라기처럼 불살라지겠다는 말씀은 전쟁이 아주 끝나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전쟁이 끝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쟁도구들도 다 사라집니다. 이사야서 2장 4절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칼로 삽을 만들고, 창으로 낫을 만드는 날이 오겠다는 말씀입니다. 극적인 반전이지요.
삼위일체(trinity)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교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심판은 큰 연자맷돌과 같다. 이 연자맷돌은 돌지만 소리가 없고, 아주 천천히 돌지만 매우 보드랍게 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근시안적(近視眼的)으로 볼 때에는 막막하고 답답하지만 거시적(巨視的)으로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의해서 모든 불의와 죄악은 파해지고 정의와 진리는 승리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반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서 비롯됩니다. King James Version은 문장 첫머리에 나오는 불변사 ‘키’를 nevertheless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함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이 세상에는 흑암 속에 있는 사람도 있고 슬픔 속에 있는 사람도 있고 전쟁 속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하던 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열심이 어떻게 이루실까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가지 이름 속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첫째는, 기묘자(펠레)입니다. 기묘자는 ‘놀라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둘째는, 모사입니다. 모사(요에츠)는 ‘조언해주는 사람’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모사라는 것은 자기 백성들이 직면한 삶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입니다. 보통 전능하다고 할 때에는 ‘샤다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깁보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룻기를 보면 애처로운 청상과부인 룻을 도와주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해준 보아스를 가리켜 깁보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통 속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져내시는 능력 많으신 분이시며 결국에는 신랑까지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아비아드)입니다. 근동에서 아버지란 말은 육신의 아비도 나타내지만 보호자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보호자(보혜사)가 되셔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임마누엘).
다섯째는, 평강의 왕(사르 솰롬)입니다.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위대한 통치자도 줄 수 없는 진정한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상징하는 짐승의 숫자가 666이란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숫자(음가(音價), 게마트리아)는 888입니다. 6은 완전수인 7보다 하나가 모자란 숫자이고 8은 완전수에서 하나가 남는 숫자입니다. 8은 ‘새로운 시작’(부활을 포함해서)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고도 남는 분이십니다.
정리하면 성탄은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인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므로 BC(紀元前)와 AD(紀元後)로 나뉘어졌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므로 흑암은 빛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전쟁은 평화로 바뀌는 역사의 대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다섯 가지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열심으로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쁜 성탄을 천사들과 같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외치며 감격스럽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12.1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