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장로교회
한 해가 저물기 직전에 있는 크리스마스시즌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키고(Fix our eyes on Jesus)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Fix our thoughts on Jesus)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전에 유럽의 한 유명한 신학자가 미국의 유명 신학교에 와서 학생들과 교직원 앞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강의 후에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은 하나님이 다른 종교를 통해서는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고 오직 기독교를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박사님은 큰 소리로 “아니요, 하나님은 기독교를 포함하여 그 어떤 종교를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No, God has not revealed Himself in any religion including Christianity)”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 하셨습니다(He has revealed Himself in His Son, Jesus Christ)”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완벽하게 계시하셨습니다.
본문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The Word became flesh(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되심’(became)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성탄의 최고 메시지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려고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첫째는 임마누엘(Immanuel)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성탄의 최고 메시지는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창조사건만큼이나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만큼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처럼 되어 그 피조세계에 오시고 그 피조물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귀족들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유색인종과 어울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은 그 본질부터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기에는 너무도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영광스런 왕궁의 침대에 뉘이셔도 그곳이 추하게 느껴지실 텐데 그 분은 비천한 마구간 말구유에 뉘이셨습니다. 그 분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기에 가장 부요하게 사셔도 부족하실 텐데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창28장에 보면 야곱이 하란으로 도피하는 길에 누워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형의 낯을 피하여 외롭게 도피하고 있는 야곱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는 말씀이었겠습니까? 그 때 야곱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있는 야곱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땅과 함께 있으려고 땅으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진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시어서 사람과 함께 계신다는 것은 인간존재에 관한 모든 절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늘로부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우리는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주님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시고 나는 홀로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과 나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슬픔이 그분 안에서 기쁨으로 바뀌고 나의 눈물이 그분 안에서 웃음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이 그분 안에서 강함으로 바뀌고 나의 가난이 그분 안에서 부요함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평안이 나의 평안 되어 내 가슴에 스며들고 그분의 능력이 내 능력 되어 나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죽을 몸이 그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소망 없던 내가 그 분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팬데믹 속에서도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임마누엘의 비밀이요 이것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둘째는 케노시스(Kenosis)입니다.
그분은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워(kenosis)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성육신은 자기를 비우심(made himself nothing)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순종, 섬김, 겸손, 수욕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섬김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며 하나님께 순종의 극치를 보여주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며 구원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때문에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도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비방해도 대항하지 않았고 대신 욕하지도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닮은 자로 살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 반목 시기 질투 미움 같은 것들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 안에 예수님이 사시기에 교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시기도 질투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여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에 비추어보면 그런 일도 사치스런 일에 속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저들 속에 들어가 함께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병든 자, 세리, 창기들 속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기로 작정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요구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은 자기를 비우는 결단 없이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은 남을 섬김에서 보람을 찾으셨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섬김에서 보람을, 죽음에서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리고 그런 삶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짐으로 행복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움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며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분이십니다. 성육신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케노시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레이스(Grace)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무조건적이고 자의적인 사랑이 은혜입니다.
16절에 보면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라고 했습니다. 이는 최상의 은혜요 풍성한 은혜요 계속 되는 은혜를 말합니다. 성탄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실패도 은혜요 성공도 은혜입니다. 건강도 은혜요 병든 것도 은혜입니다. 사는 것이 은혜요 죽은 것도 은혜입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끝없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는 받은 은혜가 다하면 또다시 충만한 은혜의 샘에서부터 새로운 은혜가 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평생토록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계속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큰 부자가 한 가난한 부인을 도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사는 것이 힘이 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안에는 1000불짜리 Check와 함께 ‘앞으로 더 갈 것이 있습니다’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2주일쯤 지났을 때 또 1000불 Check와 함께 ‘더 갈 것이 있습니다’라는 글이 적힌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편지를 받을 때마다 돈과 함께 ‘앞으로 더 갈 것이 있습니다’라는 글이 그 부인을 기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더 줄 것이 있다’는 사연과 함께 보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죄를 모두 용서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용서하리라” “너에게 건강을 주노라. 계속 건강케 하리라.” “네게 복을 주리라. 너뿐만이 아니라 네 자손 대대로 계속 복을 주리라” “너의 가정에 화평을 주노라. 계속해서 화평을 주리라” “너의 사업을 형통하게 하노라. 계속 형통케 하리라” 오늘 받은 은혜가 오늘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올해도 내년에도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가 더욱 창궐함으로 모두가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는 주님의 통제 하에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나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비움으로 겸손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교만을 버리고 섬김을 실천하며 겸손하게 사십시오. 크리스천의 최고 덕목은 겸손에 있습니다. 겸손하면 평안을 누리지만 교만하면 분요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충만한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은혜를 알면 모든 것이 감사요 평안이요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임마누엘의 확신 속에서 주님의 겸손을 닮아가며 은혜에 감사하며 성탄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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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