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경선은 1899년 평안남도 순천군 효탄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농업학교를 거쳐 서울의 감리교 협성학교를 졸업하고, 7년간 진남포 중앙교회와 평양 류정교회를 섬겼다.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산하의 동우회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4, 5년간 이상촌 건설을 기획하고 용성 농촌직업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37년 5월에 이경선은 흑인 농민 교화 사업과 일반 종교교육 사업을 시찰하고자 도미했다. 그해 11월 1일 케논 감독이 상항 남감리교회 글라이드 메모리얼 예배당에서 미국 남감리교회 동양인 선교연회를 개회하고 한인교회에 관하여 처리했을 때 이경선은 나성한인감리교회 부목사로 임명받았고, 본 교회 담임목사인 황사용을 도와 교회를 섬긴다.
같은 달 나성한인감리교회는 다수 청년으로 찬양대를 조직하고 소녀들로 유년 찬양대까지 조직하여 새로운 면목을 가졌다. 같은 달 18일 저녁에 동 교회에서는 70여 명의 교인이 흥사단 사교실에서 모여 사교회를 열었다. 두 찬양대의 청아한 노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순서가 있었고, 특히 동 교회의 부인전도회가 양 찬양대를 위하여 다수한 선물을 주어 장려하는 뜻을 보였으므로 일반 교인들이 고마워하면서 화기 충충한 가운데 헤어졌다.
그해 이경선이 감사절의 사회를 보았다. 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청년 찬양대와 유년 찬양대의 합주와 김엘시와 안숙자의 독창은 빼어났다. 그해 성탄절은 2,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내 남가주 대학교회 예배당을 빌려 25일 오후 7시 30분에 성탄절 행사를 치렀다.
1938년 3월 20일에 국민회 주최로 나성 한인장로교회에서 있었던 도산 안창호 추모식
1938년 2월 6일 한인감리교 예배당에서 이 암의 사회 하에 국민회 창립 제29주년 기념식에서 국민회 청년부 총회장 김필립에 이어 이경선도 연설을 담당했다. 다음 달 10일 오전 3시 30분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경성에서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경선이 도산 선생 영전에 올린 글이 그달 17일에 신한민보에 아래와 같이 게재되었다.
선생님,
참으로 가셨습니까? 저희들을 버리고 이대로 가셨습니까? 불효 문하생의 가슴은 지금 터질 듯하옵니다.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슬픈 생각, 흐르는 눈물, 오! 선생님, 참으로 가셨습니까? 사랑하는 나라 ... 를 두고 이대로 가셨습니까? 선생님, 지금 이천 삼백만 동포는 울고 있습니다. 삼천리강산의 산천초목까지라도 울고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지금 누구를 따라 가오리가? 앞을 내다보니 앞길이 아득할 뿐입니다...
선생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싸우심과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진성으로 일관한 생활과 사업은 천추만대에 영원히 살아있어서 배달민족의 피와 살과 뼈가 될 줄을 아오며 인류의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선생님, 불초 문하생에게 ‘묵언 실행자’라는 별명을 주신 것을 잘 기억하옵니다.
저는 오늘부터 묵행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오! 선생님 선생님의 거룩하신 영이 이천 삼백만 머리 위에 임하소서. 사랑하는 동지들의 머리 위에 임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앞길을 밝히 가르쳐 주소서.
1938년 4월 17일 부활주일 오전 10시 30분에 나성 한인장로교회는 담임목사 김성락 박사의 사회로 예배당 개전식을 거행했을 때 이경선 목사는 기도순서를 맡아 장감의 연합정신을 보여 주었다. 본 예배당은 성경 교수실, 관서실, 사교실 및 주방을 완비했다. 그해 12월 1일 이경선은 지난달 24일에 쓴 “흙 한 줌”이라는 글을 신한민보에 게재했다. 이 글에서 그의 나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937년 도미 나성한인감리교회 부목사 임명받고 1943년까지 사역
워싱턴주립대 조선어교수로 재직, 49년 북한에서 미 간첩으로 사망
... 맑은 하늘은 높고 금풍은 소슬한데 정든 고국을 떠나 수만리 이역에서 가족 친척 친구 동포 그리운 강산이 모든 생각이 염두에 떠오를 때 하염없이 애틋한 심서를 금할 줄이 없다. 하물며 고국이 원수의 압박 밑에 감옥화 함과 이천삼백만 동포의 굶주리고 헐벗은 참상을 상상함이랴.
며칠이 지나면 감사일이다... 나는 금년 감사일을 어떻게 지낼까 하고 생각하던 중에 ... C와 S 고학생 친구들이 이역에서 첫 명절을 당하여 외로움을 느낄 듯 하니 그들한테 가서 하루 즐겁게 놀자고 함으로 감사일의 순서는 결정되었다.... 나는 그날에 지난 것을 다 쓸 수 없다. 다만 나의 가장 느낀 바 사실 한 가지만 기록하려고 한다. C와 S가 유하는 방 안에는 조선 지도, 경치, 성구, 선비들의 훈화들을 벽에 붙였고 한편 벽에는 종이에 싸고 또 싼 이상스러운 종이 보자기 하나가 걸렸는데... 일행은 그 보자기를 내려 헤쳤다.
... 한 봉지는 전라도 논에서 취한 흙이오. 한 봉지는 평안도 밭에서 취한 흙이라고 한다...그 흙의 냄새를 맡는 그 순간 나의 심정은 형용할 수 없는 감각과 느낌을 감하였다... 그리운 고국 언제나 다시 만나볼까? 그 흙을 가지고 온 이는 S다. 그는 평양 북촌 사람으로 농학에 뜻을 두고 장차 농촌 운동에 헌신하려는 청년이다. 그가 농촌에 뜻을 둠이 개인의 취미도 취미려니와 인구의 8할 이상을 점령한 피폐한 조선 농촌을 목도할 때에 깊이 사명감을 느낀 것이라고 한다. 농촌에 뜻을 둔 청년으로 조선의 땅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고국의 흙을 이곳까지 가지고 온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런 보물뿐 아니라 그 이상의 보물이 반드시 있을 줄 믿는다. S는 당년 이십 세의 청년이다. 청년이라기보다 소년이라고 함이 가할 듯하다.
그는 조선이 임의 일본에게 병합을 당한 뒤에 났고 교육을 받았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진정 나는 모르는 동안에 그의 앞에 머리가 숙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한번은 어떤 예배당 강단에서 설교하였는데 그 설교의 대요는 ‘조선 청년아 대고구려 정신으로 돌아가자’함이었다... S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청춘에 홀로 된 어머니의 외아들로 양육을 받아 오늘까지 온 것이다. 그 어머니는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S를 교육하느라고 혹은 평양을 혹은 동경을 상상키 어려운 곤란을 당하였다고 한다. S는 원대한 뜻을 품고 지난 8월에 혼자 미국에 있는 그 조부의 알선으로 미국에 왔다.
의지할 곳이 없는 그 어머니는 오직 하나인 그의 외아들 멀리 태평양 건너로 아들을 보낼 때에 그 어머니의 마음이나 아들 된 S의 마음이 과연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작별하던 그 순간에 아들을 격려하여 ‘나는 너를 조선에 바친 조선의 아들이니 나를 위하여 조금도 생각지 말라’하는 말로 석별의 말을 끊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나는 그 어머니가 S에게 보낸 편지의 한 절을 들었는데 그 편지는 S가 어머니 보고 싶어서 울었다는 편지의 답장이었다. 그 편지의 일절에 ‘어머니 보고 싶어서 우는 녀석 장차 무엇하겠니? 어머니 보고 싶어서 울지 말고 조선을 생각하고 울어라’ 하였다. S가 그러한 현모를 둠이 또한 복된 일이다. 감사일을 당하여 감사할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나는 그날에 조국의 흙냄새를 맡아봄이 가장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를 떠나서 황혼을 안고 돌아오니 밤 9시였다.
1939년 6월 상항에서 열린 감리교회 연환회는 가주에 5개 처의 한인감리교회에 총 350여 명의 교인이 등록된 것으로 보고했고, 한인들이 나성으로 급격하게 이동함에 따라 나성감리교회의 사역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본 연환회에 참여하였던 이경선 목사는 그달 25일 오크랜드 한인감리교회에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의 대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사랑하라’였고, 교인이 많이 감동하였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이경선은 담임목사 이진묵을 돕는 부목사였다. 당시 교회는 나성 웨스트 제36 프레이스 909번지에 있었으며, 등록 교인 130명 중 활동 교인은 85명이었다. 그리고 주일학교는 45명이었고, 엡윗 청년회에서 21명이 활동했다.
이듬해 본 교회는 연회 산하 선교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1,500달러로 예배당 대지를 구매했고, 선교부는 3,000달러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성 선교회는 건축비로 1,000달러를 약속했지만, 교회 위원회는 건축을 위하여 더 나은 상황을 기다렸다.
잠정적으로 본 교회는 버몬트와 제퍼슨이 만나는 곳에 있는 굳 템프러스 홀에서 예배를 드렸다. 1943년에는 1941년에 비해 등록 교인이 20명이 증가한 150명이었으며 활동 교인은 15명이 증가한 100명이었다. 주일학교에는 5명의 교사가 25명을 가르쳤고, 엡윗 청년회에는 35명이 활동했다.
와싱톤 주립대학
이경선이 1943년에 미국 내 한인 선교사역을 떠났다. 그해 7월 상항에서 국방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그해 11월에 시애틀의 워싱턴주립대학의 조선어 교사로 초빙되었다. 1945년 3월 새조선을 출판했을 때 그는 조선 혁명운동 투사로 소개된다. 그가 발표한 혁명 이론과 방법을 서술한 150페이지의 이 책은 정가가 1달러로 우송료는 10센트였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총서기로 활동하다가 1949년 북한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미제 간첩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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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