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진 목사
(전주 예수비전교회)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건 불변의 진리입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에 역행하는 주장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었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이 바로 그 주장입니다. 왜 기독교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혹시 1세기 사람들은 미개했기 때문에,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고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 당시가 오늘날과 비교해볼 때 미개했고 과학이 발달되지 않는 시대였다 할지라도, 적어도 한 번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1세기보다 1000년 전의 사람이었던 다윗 왕은 자기가 낳은 아기가 죽게 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2-23). 아무리 고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살아날 소망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던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 상태 또는 의식불명의 상태였을 뿐이었던 것이고, 차가운 무덤의 공기 때문에 다시 깨어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종종 뉴스에 보면 죽은 줄 알고 장사를 지내려고 했지만, 다시 깨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들이 보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정황들은 예수님께서 잠시 기절했거나 의식불명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병실에 누워 있다가 운명한 것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해 모든 피를 흘렸고, 결국 그 죽음을 로마의 군사들이 확인했습니다.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할만한 조그마한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군사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19:33).
더 나아가 로마 군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더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19:34).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만 나온 것이 아니라 물도 나왔다고 하는 이 표현은 그 사실을 직접 목격하거나 그 사실을 정확하게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의거하여 기록한 표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물이 나오는 이유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리 스트로벨은 메드럴 박사의 설명을 자신의 책, “예수는 역사다”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혈량성 쇼크는 심장 박동 수를 지속적으로 빠르게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심장을 정지시킨 원인 중의 하나였죠. 그렇게 되면 심장 주위에 있는 막 조직에 액체가 고이는, 심낭삼출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폐 주위에도 액체가 고이는데 이것은 늑막삼출이라고 불리죠.... 로마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의 오른쪽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확인했던 사건 때문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경의 묘사를 볼 대 아마도 오른쪽 옆구리, 갈비뼈 사이였을 겁니다. 창은 오른쪽 폐와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그래서 창을 뺄 때 물처럼 보이는 액체-심낭삼출과 늑막삼출-가 나왔습니다. 요한이 복음서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온 다음에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왜 피와 함께 물이 같이 나왔는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만 적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진짜로 십자가에서 운명하였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던질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적인 불변의 법칙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일까요? 과연 그러한 주장을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기 때문에 과연 1세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의 토양에서 갑자기 기독교가 탄생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유대교는 철저하게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종교였습니다. 만일 유대인들 가운데 누군가 다른 신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신성모독을 하는 것이어서 죽임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유대교의 토양 한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입니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뿐입니다. 부인할레야 부인할 수 없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로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고, 동네에서 축출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 신앙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신명기의 말씀(21:23)에 따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사람의 관점으로 본다면, 에수님은 가장 극악무도한 죄수로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그런 사람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1세기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걸면서 전한 복음이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5:20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무에 첫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면 그 뒤로 계속해서 같은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듯이, 우리도 주 안에서 다시 부활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고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더 좋을까요? 미래에 아무런 소망이 없고 죽으면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소망이 없이 사는 사람이 좋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언젠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좋을까요?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그 약을 불신하고 복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병에서 나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선택할 것이 있다면 우리 인생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질문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주실 것입니다.
04.1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