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원연구소 대표)
한 달여 간 가장 가깝다고 여기던 친구와 단절이 되었다. 이전에도 두어 번 그랬기에 무엇인가 단단히 오해가 생겼거나 본의 아닌 실수가 있었나보다는 생각으로 되짚어 봐도 그럴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어제 모임에서 오랜 만에 만나 그 이유를 들으면서 좀 황당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따지게 되면 또 다른 불편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 사과를 함으로 일단락이 되었으나 많은 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은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상대에게 말한 것으로 착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듣지 못한 말을 그가 했다는데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화단이 생긴 것이었다. 그의 호의를 받으며 나는 분명 고맙다는 말을 했는데 그는 그 말을 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호의를 베푼 그의 기대에 미칠 만큼 반응하지 못하고 그가 들을 만큼 분명하게 감사를 전하지 못한 내 탓이라 여겨 사과를 했으나 찜찜한 여운을 지워내려면 이제는 내게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친구(親舊)란 가깝게 오래 사귄 벗을 일컫는 까닭이다.
가까운 사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본질은 이해와 양보다. 베드로 전서 4장 8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잠언 10장 12절에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지금도 친구라고 불러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인 예수님을 친구로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의 죄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 허다한 죄와 모든 허물을 덮는 것이 사랑임을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라고 말하면서 자기 입장에서 오해하거나 그것을 찜찜하게 여기는 것 모두 진정한 친구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친구는 사랑하는 사이고 사랑하는 사이는 허다한 죄와 허물을 다 덮어야 하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본질(本質)을 사전은 본바탕 또는 본디부터 갖고 있는 사물의 독자적인 성질이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가 본질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 사람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 8).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았다면 사람도 사랑이어야 한다.
세상에 죄가 관영해지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본질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교회가 본질을 상실한 까닭이다.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그러질 못하니 어둡고 부패한 세상이 교회를 잠식해가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풍자가 있다.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이 교회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이라는 지적이다. 생명의 소식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외쳐야 될 교회와 교인들이 오히려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야 될 대상이라는 이런 지적이 풍자(諷刺)보다 더 치명적인 사실이 된 이유역시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본질을 벗어나 창조주처럼 되고자 했던 것이 죄 된 사람의 시작이었듯 사랑도 친구도 본질에서 어긋나 있다. 그래서 사랑이 변질되어 미움과 원망과 질투가 자라고 커져 살인에까지 이른다. 친구사이에도 양보와 이해는 뒤로 밀려나고 모순과 형식이 더 중요해진다. ‘내로남불’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지는 것 역시 본질에서 벗어난 탓이다.
사순절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며 되돌아볼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신 예수님은 본질에서 이탈하려는 육신의 유혹을 떨쳐내시기 위해 피땀을 흘리시며 힘겨워하시는데 제자들은 오히려 잠들어 있다. 나를 위해 깨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제자들은 동참하지 않고 잠들어 있다. 한 시간마저 깨어 기도하지 못하면 시험의 잠을 자게 되며 본질에서도 어긋나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뜨르는 이 시대에 대해 목표는 있으나 거기에 이를 길이 없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천명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목표에 이르는 비결이며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다. 사람의 본질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다. 이를 아는 것이 신앙이다.
hanmac@cmi153.org
04.27.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