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1900년 중국 청나라에 의화단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북청사변이 일어났다. 이 사변을 일으킨 농민들은 청나라를 도와 서양 세력을 물리친다는 뜻의 ‘부청멸양’을 외치며 외국인 세력을 배격하였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고 때리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누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기준이 있었다. 기독교인의 얼굴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광채가 있었고 이 광채로 그들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 험한 시대에 박해를 위한 구분이었지만 기독교인의 얼굴에는 남다른 광채가 있다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광채가 있을까. 누가 그 얼굴을 보아도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 수 있는 기품이 흐르고 있는가? 말을 달리하지 않아도 세상을 압도하는 그 광채가 있는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있었다. (출 34:35) 모세만이 아니다. 시편 34편 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주를 대면하는 자, 주를 앙망하는 자는 누구나 광채를 입는다. 그리하여 그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도 그랬다. 거기서 그는 가족과 재산 모두 건네 보냈다. 야곱은 홀로 어두운 밤 가운데 있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 그와 더불어 밤새 씨름하였다. 그때 그는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창 32:30-31) 장엄한 광경이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된 야곱에게는 찬란한 광채가 비추었다. 야곱이 비록 절게 되었지만, 그에게 임한 광채로 능히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가을이 가을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형형색색(形形色色)의 단풍이 온 땅을 찬란하게 수 놓고 있기 때문이다. 장관(壯觀)이다. 멋진 단풍이 있는 곳엔 사람들의 발길과 시선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아무리 단풍이 멋있어도 머지않아 낙엽이 되어 이리저리 뒹굴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광채가 곧 낙엽이 될 단풍만도 못하여서야 되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려주는 성경도 읽지 않는다. 그런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읽는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알게 해줄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의 빛이 우리에게서 더욱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 27:17) 그 사람 얼굴은 그 사람 마음의 창(窓) 같다. 그 얼굴은 그 인격의 모델하우스 역할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의 얼굴은 어떨까. 나에게도 세상 사람과 구분되는 그리스도인의 광채가 있을까?
10.2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