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以後)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내일모레면 광복 77주년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본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광복은 우리에게 자유를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자유만이 광복의 전부가 될 수 없다. 통일과 번영과 섬김이 자유의 뒤를 따라야 한다. 분열 속에 무슨 자유의 기쁨이 있으며, 배고픔 속에 자유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섬김보다 탐욕을 선택하는 자를 어떻게 진정한 자유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남북과 동서의 통일이 있는 자유, 민족의 번영이 있는 통일, 세계를 향한 섬김이 있는 번영이 아니라면 일제의 강점기 못지않은 슬픔을 자아낼 것이다. 광복 못지않게 광복 이후가 중요하다. 광복절 노래를 다 기억하시는가. 놀랍게도 광복절 노래는 쓰라린 일제 강점기를 회상하기보다 진취적 미래를 더욱 바라보고 있다. 광복절 노래는 이렇게 부른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날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함께 힘써 나가세 함께 힘써 나가세” 광복절 노래는 지난날의 원한에 사무쳐 있지 않고,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세계 지향적 비전을 선명히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여러 정황이 말하기를 광복이 며칠만 늦었어도 수많은 기독교인이 학살을 당할 뻔하였다고 한다. 일제에게는 한국의 기독교가 눈에 가장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의 강점기 정책에 항상 강력한 저항은 기독교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의 기독교는 그 시대의 역사와 유리(遊離)되어 있지 않다. 한국 기독교도 그렇다. 한국의 기독교는 개화기 때에는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앞선 역할을 하였고 민족과 인생의 기본권마저 말살해 가던 일제 강점기 때에 저항운동을 통해 한국이 자유를 되찾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광복 이후 기독교는 6.25 전쟁,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모두 역사의식에 깨어있던 기독교의 역할이었다.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은 일반인의 역사의식과 다르다.

 

한국의 최초 선교사들은 한국의 역사의식을 새롭게 했다. 복음을 믿어 기독교인이 된 이들이 역사를 사람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한 것이다. 광복 이후 대부분 한국인이 일제 강점기를 식민사관(植民史觀) 또는 민족사관(民族史觀)으로만 바라보려 하였는데 그 관점을 선교사관(宣敎史觀)으로 보는 일이 기독교에서 일어난 것이다. 일제로부터의 오는 협박(脅迫)과 회유(懷柔)에 저항하고 순교하는 기독교인을 배출하면서 한국 기독교를 정결하고 강력하게 하시어 마지막 시대의 선교에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역사의식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축복이었다. 광복 이후 분명하게 갖게 된 한국 기독교인들의 선교사관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향후 한국 기독교의 행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 특히 팬데믹 이후에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식은 자신의 자구책 마련에도 경황이 없을 정도로 상실되어 있다. 기독교가 민족의 희망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끄럽다. 광복 이후 77년이 지나고 있다. 해방 이후 전정한 해방을 맞이하려면 더 늦게 전에 올바른 역사의식, 곧 선교사관의 회복이 절실하다.

08.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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