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선택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이렇게 기도한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여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러나 이 둘의 차이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 기도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감동을 자아낸 명(名) 기도문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렇다. 짧은 기도문 속에 겸비함과 결연함, 그리고 번뜩이는 분별력까지 분명히 담아냈다. 우리의 삶에 평온과 용기와 지혜는 함께 어울려져야 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그 어울림이 모호해질 수 있다. 지혜가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현실을 수용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패착(敗着) 하면 타협이 평온으로 둔갑할 수 있고 만용이 용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개인에게 속해 있지만 그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란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꾀가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혜는 공동체를 위한 깊은 분별력이고 밝은 통찰력이고 넓은 판단력이다.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지혜의 공공성을 외면하고 공동체를 이끈다면 자신의 사리사욕을 그럴 듯 포장한 협잡꾼에 불과하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왕상 3:9-11) 솔로몬이 공동체를 위한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지혜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면 멋진 변화의 감격은 둔감해지고 치졸한 생존의 기쁨은 넘칠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선택"이라는 표현을 최근에 들었다. 지난 9일 러시아 전승일 기념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이 전쟁 승리를 선포하거나 총동원령을 내릴 것이라고 예측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푸틴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진작 선택하지 않았어야할 선택이 있어야 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다. 그의 전쟁선택은 지혜롭지 못했다. 그 어떤 이유가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 수많은 민간인, 그리고 젊은 군인들이 죽어가는 것보다 가치있는 이유이겠는가. 지혜로운 선택의 공공성을 여지 없이 짓밟은 미련한 선택이요 사악한 처사였다. 이제라도 선택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더 이상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10일에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직책 앞에는 모든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지혜로운"이란 수식어가 있어야 한다. 지혜의 선택이 국민 모두에게 가져다 줄 변화와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지도자의 지혜롭지 못한 선택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보았듯이 측근의 사람들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그밖의 사람들에겐 끝없는 고통을 자아낼 것이다.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진정한 지혜는 모든 선택에서 자신은 아플지라도 모두에게 소망을 주셨던 지혜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온다. 새로운 대통령을 위해 누군들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 자신이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지혜에 대한 분명한 약속의 말씀이 있지 아니한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0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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