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2013년 3월이 다 가던 어느 날 차가운 바다를 향해 가장 가슴 아픈 명령이 있었다. 천안함 용사들에 향한 명령이었다. “772함에서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의 어두움도 서해의 그 어떤 급류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가스터어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귀대하라. 772함 나와라. 유도조정실 안경환 중사 나오라. 보수공작실 박경수 중사 대답하라. 후타실 이용상 병장 응답하라. 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 위로 부상(浮上하라. 온 힘을 다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지금까지 아무도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도 아직 울고 동료도 국민도 여전히 슬픔을 가눌 길 없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부활은 명령으로 이루어진다.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행렬을 멈추신 예수님이 청년에게 부활을 명령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눅7:14-15). 청년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남에는 청년의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어떤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5:41-42). 소녀가 예수님의 명령대로 일어났다. 소녀는 지체하지 않고 일어났다. 다비다도 자기의 선택이 아니라 명령대로 살아났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9:40).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다. 부활을 명령하니 명령대로 모두 살아났다. 기독교는 이 부활을 증언하는데 목숨을 걸었다. 우리 모두 믿고 고대하는 부활의 그날이 있다.
그날의 부활은 오늘의 이 땅에서 새로운 생명으로도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부활의 명령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새 생명에 그치지 않는다. 다시 살아나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부활의 명령은 사명의 명령으로 이어진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사60:1-2). 그렇다. 부활한 자는 혼자 희희낙락할 일이 아니다. 빛을 비추어야 한다. 아직 어둠이 땅을 덮고 있고 캄캄함이 사람들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사람들은, 빛으로 일어선 사람들은 보게 되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60:4). 부활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이키는 찬란한 빛의 사명도 품고 있다.
모세가 보았던 불붙은 떨기나무를 생각해 보라. 잡목에 불과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나무는 타지 않았다. 하나님의 불을 품은 떨기나무는 80세, 생명을 다한 것 같은 떨기나무에 불과한 모세에게 여호와의 불이 임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을 보여준다. 또한 불붙은 떨기나무는 연약함에도 살아나 다시 죽지 않고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를 예표 한다. 부활은 반드시 빛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그 빛은 많은 자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쓰임 받는 빛이어야 한다. 그렇다. 부활은 사명을 품은 명령이다. 차가운 밤바다와 같은 2022년 4월이다. 어떤 환경이든 명령은 명령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명령이 허공에 부서지지 않도록 즉각 응답하라.
04.1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