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모든 인생에는 상처와 아픔이 있다. 그중에 가족의 죽음은 가장 큰 아픔이다. 어느 가정이나 죽음은 찾아온다. 극심한 슬픔도 함께 온다. 가족 상실의 고통에서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도들을 볼 때 그들의 고통에 비견할 고통이 목회자에게도 있다. 나사로가 죽었다. 그의 누이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슬픔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다. 그 대화 는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오라버니를 장사지낸 마리아도 울었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도 울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울음을 비통히 여기셨고 불쌍히 여기셨다. 마침내 예수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는 것보다 더 큰 공감이 어디 있겠는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공감의 예수님은 더 나아가 함께 울어도 주셨다. 예수님은 우시기만 한 것이 아니셨다. 그 상황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이다. 죽은 자의 냄새가 나는 자리에서 놀랍게도 감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눈물을 넘어 감사하셨고 마침내 나사로를 살려내셨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고 기도하셨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애처로움에 우시기도 했다. 자신이 그토록 우셨던 예수님이 인생의 눈물을 외면하실 리가 없다. 나의 아픔에 지나치실 리가 없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아들 어거스틴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던 모니카에게 암부르스 감독이 한 말이다.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신 말씀이 왜 우리에겐 없겠는가. 하시리라. 전쟁의 참화 속에 쏟아지는 우크라이나와 그곳을 향해 기도하는 처처의 눈물도 보고 계시리라.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그날이 있다고 약속하셨다.
언제 눈물이 나시는가. 어떤 단어를 들을 때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가. “저는 유대인이란 단어만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유대인을 선교하기 위해 삶을 드린 선교사님의 고백을 들었다. 교회 청빙 제안에는 흐르는 눈물이 없다고도 하셨다. 눈물의 그 선교사님은 약한 것 같지만 타협을 모르는 강한 용사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8-19). 그의 사명의 자리에 눈물이 있었다. 그렇다. 그 말만 들어도 나의 눈물이 흐르는 곳에 나의 사명이 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눈물이 메말라 있다는 것이다. 공감의 눈물, 기도의 눈물, 사명의 눈물이 흐르지 않고 있다. 습기가 없는 곳에서 어떤 곡식이 자라겠는가. 눈물이 없는데 어찌 이 힘든 세상에 공감과 위로와 사명이 있겠는가.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눈물이 회복되는 것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6-17).
03.1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