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던져진 바울을 보고 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했고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기뻐하며 살라고 권면하였다. 그는 어디에서고 이렇게 외쳤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패러독스다.
토키치 이치는 스무 번 이상 감옥에 들락거리다 잔인한 살인 혐의로 1918년 도쿄에서 교수형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건네준 성경도 읽고 말씀도 들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는 이런 글을 남기고 예수님 품에 안겼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사람들은 내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몹시 슬퍼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감옥의 작은 방에서 사형 날을 기다리는 나는 조금도 슬프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는 무한히 행복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자를 부요하게 하고’-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 나 같은 악당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가난한 내가 많은 자를 부유하게 만드는 자 될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을 교회에 초청하여 만난 것은 중등부 교육전도사 때였으니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시는 슬프게 시작된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재물도, 지식도, 건강도 없다니 얼마나 참담한가. 그러다 놀라운 긍정의 패러독스가 이어진다.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런 긍정적인 패러독스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패러독스를 말한 사람도 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병원과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부정의 패러독스는 부인하고 싶으나 사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긍정의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존재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가는 긍정의 패러독스 사람이다. 세상의 고정관념을 뒤집어 놓으며 살아가는 긍정의 패러독스 사람이다. 세상의 계산과 판단을 부끄럽게 만들며 사는 긍정의 패러독스 사람이다.
03.1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