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라 사모 (텍사스 빛과소금의교회)
새벽비가 주룩 주룩 내린다. 그 비를 맞아보며 어쩌면 바싹 말라버린 잎사귀 같아 만지면 다 부스러질 것 같은 메마른 나의 영혼을 촉촉이 젹셔 주는 가슴 벅참을 만나본다.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숨을 토해내며 살기도 바쁜 하루의 일과 속에서 그저 손만 한번 잡아줘도 금방 눈물이 글썽해지는 착한 사람들...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 올리면 하늘을 쳐다보아도 눈을 감아도 또 운전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가슴 한 구석에 아픔이 스며오고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하는 것을... 그걸 그냥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해 버리기엔 그 의미가 너무 작아질 것 같은... 그렇게 많은 세월을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며 우린 오늘에 이르렀다 서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서... 야곱이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렇게 두려웠던 형을 만나자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을 만나니까 두려웠던 사람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눈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형제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한다. 내 남편 속에서 내 아내 속에서 내 자녀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때야 우린 눈물을 훔치면서도 끝까지 끝까지 사랑할 수 있으리라.
삶이 깊어 간다는 것은 결국 창조주가 만든 존재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구름을 뚫고 하늘을 보며 지구를 울타리로 삼고 산다면 뭐 그렇게 화날 일이 있겠는가? 뭐 그렇게 죽을 일이 있겠는가? 다 생각과 감정이 만들어낸 조작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벅참만 만나면 한 방에 다 날려버리는 어리석음들이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필터를 통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리라. 그래서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세상이 바로 보이는데, 세상만 쳐다보니 마음이 안 보일 수밖에…그렇다. 집을 보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듯 내 마음을 보려면 마음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내 생각이 끝나는 자리라야 하늘은 시작되리라.
신발이 다 떨어져도 새 구두 하나 살 여유가 없다고 짜증을 냈는데 옆의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니 목발이다. 나는 새 신발 하나 못 신는다고 투덜댔는데 저 사람에게는 신발이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니 얼마나 우리 인생이 부끄러워지는지…. 그렇다. 삶이라는 것은 내가 어느 날 무엇 하나를 잃었다 해서 내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리라. 오히려 내 것 하나를 잃음으로서 다른 많은 사람의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다면… 그런 경지를 깨닫는 것이 삶의 진수가 아닐까. 생명력이다! 나는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 일이다. 새로움과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는 게으름이 곧 교만이다. 그 길은 필경은 사망의 길인데 말이다. 늘 그렇게 살면서 새로운 내일이 오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살았던 38년 된 병자처럼 참 오래도 그렇게 살았다. 병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살려달라는 외침인데 계속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니 할 수 없이 병이 찾아온다. 이제는 38년이나 주저앉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주님의 말씀이 극적으로 내 삶 가운데도 좀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사람은 설 수 있어서 사람인 것을, 다시 한 번 몸을 세우고 마음을 세우고 뜻을 세울 때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살았던, 눌러놓고 참았던 그것들을 조금씩 대면하며 진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말씀을, 결국은 사랑이 이긴다는 진리를 증명해 보이는 내 삶이 되리라. 원하는 것 따로 말과 행동 따로 산 결과로 꽈배기처럼 꼬여있는 인생을 하나 하나 풀어 가는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 해도 성심을 다해 풀고 풀면 나사로를 향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던 주님의 음성에 오늘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그 일을 계속하게 되리라. changsamo102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