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목사 나성서부교회 / (310)749-0577 E-Mail: LSPC0316@yahoo.co.kr,
Q: 6.25전쟁의 전후 상황과 공산주의가 거의 한국을 다 집어 삼켰는데 어떻게 기적적으로 회생하게 되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A: 1950년 6월25일 비가 촉촉이 내리는 조용한 주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암호명 “폭풍”을 명령해서 일제히 38선 남쪽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해방 후 5년간 적화 통일의 야망을 불태우며 전쟁준비를 끝낸 김일성 공산군은 소련제 탱크와 야전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6.25직전까지 한국의 정치가들과 군수뇌부인 국가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아무런 무기나 전쟁준비도 안 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는다고 큰소리나 치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 당시 통계를 보면 한국군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탱크나 자주포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터졌습니다.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점심은 서울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는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이 파죽지세로 밀렸습니다. 경비대 밖에 안 되는 군대를 출전시켜 응전 했으나 우리는 호랑이 앞에 강아지 꼴이었습니다. 이제 나라는 풍전등화로 완전히 공산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공산당이 낙동강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제 낙동강 전선에서 밀리면 완전히 나라가 공산화 된다는 비극의 때에 기적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부산 초량교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그들의 죄악을 회개하며 이 민족에게 한번 기회를 더 달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매달려 결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1950년 6월 26일 한 번도 합의가 된 적이 없었던 유엔파병이 허락되었습니다.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의 유엔군대가 한국전에 참전하였습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미 해군 함정 261척과 미7사단 기동부대 75,000명이 인천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 지휘관 회의에서 성공률이 5000:1이라고 반대했으나 맥아더 장군의 확신으로 상륙작전을 시도하여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9월28일에 수도 서울을 수복하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낙동강전선에서 한국군과 미8군이 반격하여 10월1일에 38선을 넘어 북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들이 만들어 져서 한국을 구한 것은 결코 사람이 한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기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UN군의 참전과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그 나라와 백성들에게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6.25전쟁은 피로 전 국토를 물들이고 아무런 성과나 결과도 없이 전쟁 3년1개월 만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8시를 기해 휴전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멈춘 상태에서 오늘까지 이른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미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참전기념비에는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전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자유를 위해 희생했던 자랑스런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25 당시 워커사령관 후임으로 부임한 릿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시 UN군과 함께 반격하는데 힘썼던 장군인데 미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우리는 한국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동맹국한국보다도 우리의 자주독립과 생존을 위하여, 그리고 세계 자유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