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목사 빛과 소금교회 / (310)326-9092 E-Mail: LSPC0316@yahoo.co.kr
Q: 미국에는 한인들이 어떻게 이민 오게 되었으며 캘리포니아에는 언제 많은 한인들이 찾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미국에 와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토랜스에서 궁금이-
A: 미국에 온 한인이민자들이 어떻게 미국에 이민 오게 됐는지 캘리포니아에 살게 됐는지 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1903년 1.13일 102명의 한인 노동이민자들이 게릭호를 타고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 처음 도착했습니다. 1621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온 영국 청교도들과 102명이란 숫자가 같습니다. 한인 이민자들은 제2의 청교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희민 목사가 쓴 설교집을 보게 되면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와이 노동자들이 사탕수수밭에 이민 오게 된 배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하와이에는 일본인 노동자가 6만 명이나 되어 그들이 노동을 독점했습니다. 그들이 파업이라도 하는 날에는 주인이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 노동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05년부터 7천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는데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해 결국 이민은 중단됐다고 합니다.
1903년에서 1905년까지 7000명의 한인노동자들이 하와이에 왔는데 남자들만 왔기 때문에 결혼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국여자 혹은 일본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언어와 문화가 달라 거의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위 picture brides(사진신부)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남자들이 사진을 한국에 보내면 그 사진을 보고 신부가 되겠다는 여자들이 하와이에 와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초기에 이민 온 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사 등이 이민을 주선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민을 오자마자 예배처소를 만들고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친교도 하며 향수를 달랬습니다. 당시 한 때는 하와이에는 39개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1903년 11월 10일 공식적으로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가 세워졌습니다.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미국의 이민자들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지원했습니다. 이때 박영만과 이승만 박사는 의형제를 맺고 국민회를 조직했습니다. 일인당 5달러씩 돈을 냈다고 합니다. 5달러씩 7,000명이면 35,000달러입니다. 박용만 씨는 군인출신으로 무력으로 일본과 대항해서 독립운동을 하자는 주장을 폈고 이승만 박사는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결국은 국민회와 동지회로 갈라지게 됐습니다.
1920-30년에 접어들자 하와이의 농장을 떠나 캘리포니아 본토로 들어와 사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리버사이드, 업랜드, 리들리, 디뉴마,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정착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중심으로 살게 됐습니다. 1950년에서 1965년까지 미국에 온 한인들이 15,000명인데 그중에 미군과 국제결혼한 사람이 6000명, 입양아가 5000명 유학생이 4000명이었습니다.
한국인의 미국이민은 주로 1968년부터 시작됐습니다. 한국은 19세기까지는 별로 민족의 이동이 없었습니다. 백제가 망하면서 귀족들이 일본으로 망명간 흔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 수 만명이 전쟁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고 구한말에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민족의 이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의 이동이 시작됐습니다. 현재는 560만 내지 600만명이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한국 사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상수리나무가 잘린 것 같은 이 미국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는 거룩한 씨가 되고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되도록 우리를 이곳에 흩으셨습니다. 또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로 세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