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씨앗

변명혜 교수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여름방학을 맞아서 한국에 방문 중이다. 이번에는 딸하고 함께 방문할 수 있어서 언니들이 조카와 동생을 위해 계획한 여정대로 언니, 형부들과 함께 빡빡하게 이곳 저곳을 다녔다. 먼저 충청도에 있는 부모님 묘지에 들렸다가 천리포 수목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천리포 수목원은6.25전쟁 때 한국에 왔다가 한국을 사랑하게 되어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고 민병갈 박사가 가꾸어 놓은 바닷가 옆의 아름다운 수목원이다. 크고 작은 다양한 꽃들, 이름도 모르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한 사람이 가꾸고 남긴 자연 사랑을 여러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좋은 곳이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우리나라에 없는 나무들을 들여오기도 하고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원불교 신자였던 민병갈 박사는 생전에 친분이 있었던 우리 형부에게 자기는 환생하면 개구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니 참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 다음 코스로 간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증도를 둘러보다가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이라는 사인이 보여서 계획에는 없었지만 숙소로 가는 길에 잠간 들렸다. 순교기념관은 문준경 전도사님이 6.25동란 때 북한군에 의해 처형당한 바다가 보이는 장소에 세워져 있었다. 이미 늦은 저녁시간이어서 예배당과 전시공간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2013년에 세운 기념관 밖에 세워진 순교 기념비에는 문준경 전도사님의 60년 채 못 다한 삶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전도사님은 열일곱살 나이로 시집을 갔지만 소박을 맞아 생과부로 일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났다고 한다. 나이 사십세에 경성성서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십팔년 동안 신안군 일대 도서지역에 나룻배를 여러 번 갈아타고 섬마다 다니며 전도했고 10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다. “증도의 믿음의 어머니”로 불리는 그 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었기에 한국 기독교의 신앙적인 인물들인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목사님은 문준경 전도사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분들이라고 한다. 김준곤 목사님은 문준경 전도사님이 자신의 생애에 최초, 최대의 영향을 준분이라고 표현했다. 문 전도사님의 순교기념비에는 공산당들이 전도사님을 학살할 때 “이 반동 간나 문준경은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다”라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분의 장례식 때는 김 구 선생의 장례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하니 사람들의 삶 속에 그 분이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짧은 삶, 이 땅에서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세상을 떠난다. 자연인으로 살기를 원해 낯선 이국땅에 정착하여 그 땅의 한 모퉁이를 아름답게 꾸며 놓고 세상을 떠난 민병갈 원장의 삶은 보람은 있었겠지만 그 분의 일생의 수고가 사람의 정서를 풍부하게 가꾸어줄 수는 있어도 단 한 영혼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반면에 문준경 전도사님은 육신의 자녀는 없었지만 공산당들이 말한 대로 수많은 복음의 자녀를 낳은 위대한 믿음의 어머니셨다. 이제 그 분의 전도의 열매로 증도는 복음화율이 90%가 넘어 천사의 섬으로 불리고 있다. 

다음은 전도사님의 순교시비에 적혀 있는 글 일부분이다. “저들이 기쁘면 당신은 미소로 웃음이 되고, 저들이 울면 당신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저들이 헐벗으면 당신은 한 벌 옷이 되어 입히고, 저들이 발 벗으면 당신은 한켤레 신이 되어 신기고, 저들이 어두우면 당신은 빛이 되어 눈뜨게 하고, 저들이 배고프면 당신은 밥이 되는 바보 목자. 저들이 병들면 당신은 몸으로 약이 되신 성녀여.” 요즈음처럼 기독교가 세상의 비난을 받는 시대에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lpyun@apu.edu

 

06.0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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