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한 달 전 주일 새벽, 교회로 가는 길에 텍스트 메시지가 왔다. 30여년 전 섬겼던 뉴저지 교회의 장로님 딸이 갑자기 천국에 갔다는 메시지였다. 주님 앞에 돌아갈 때 나이 순서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있지만 이제 갓 사십이 넘은 장로님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늦게까지 짝을 못 만나는 딸의 결혼을 위해서 권사님은 금식 기도도 여러 번 했는데 일년반 전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어서 너무 기뻐하셨다. 세 자녀 중 막내를 이미 30여년 전 아기 때 잃으셨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남편이 떠난 후 긴 세월 동안 나와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에 앞장섰던 장로님, 권사님이다. 작별인사도 못한 채 다 큰 딸을 앞서 보내는 장로님과 권사님이 걱정이 되었다. 뉴욕에서 있는 장례식에 참석하기는 먼 길이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뵈어야 할 것 같아서 주 중에 잡혀있는 약속들을 취소하고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샀다.
공항에서 서둘러 간 입관예배 장소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보다 서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앉을 자리가 없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빽빽이 서 있어서 앞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린 채 예배를 드렸다. 대학 졸업 후 20년을 줄곧 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기에 회사 부사장을 비롯해서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평소에 명랑하고 적극적인 성격인 것은 알았지만 직장동료, 상사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그 딸이 얼마나 희생적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기쁨을 주었는지를 나누었다. 그 분들의 말을 들으며 장로님 딸이 짧은 삶이었으나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잘 살다간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슬픔 중에도 감사했다. 오랜 세월을 믿음으로 살아온 헌신된 분들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딸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장로님은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어요” 라고 하셨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여러 번 뉴저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엣 성도들을 가끔씩 만날 수 있었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옛 성도들의 자녀들을 30년 만에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요즈음에는 강의 듣는 학생들 이름도 갑자기 기억이 안 나서 당황해 하면서도 웬일인지 30년 전 교회에서 만난 아이들 이름은 얼굴을 보니 “어머, 별아야, 한나!, 샐리니?” 하면서 줄줄이 기억이 났다. 며칠 간 머물기로 한 어느 장로님 댁에 도착하니 옛날에 살던 집에 그대로 살고 계셨다. 남편이 유난히 편안해 했던 장로님인지라 주일에 설교를 마치고 나면 “우리 장로님 집에 가자”고 하며 마치 친척집 가듯이 드나들던 댁이다. 저녁식사 즈음에 갑자기 가겠다는 목사님에게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을 권사님 마음이 헤아려져서 남편에게 가지 말자고 했지만 유난히 사람을 좋아했던 남편은 따뜻한 정이 그리웠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친척 하나 없는 미국 땅에서 받는 이민목회의 스트레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장로님의 환대와 권사님의 된장찌개로 풀었겠구나 싶다. 옛날에는 좋은 동네에 위치한 큰 집이었던 장로님 댁도 벗겨진 페인트와 오래된 샤워룸, 옛날 장식들로 흘러 간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집안 이곳 저 곳을 보며 30여년 전 추억들을 더듬었다. “당신이 이 의자에 앉아 있었지, 이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자주 했었지.” 이미 오래된 옛 기억 속의 남편을 떠올리며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치유된 줄로 알았던 상실의 아픔이 새삼 삐죽삐죽 머리를 들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장로님 딸의 장례식을 마치고 온 날 밤,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을 뒤로 돌아간 것처럼 옛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 우리 삶은 지나가는 것이지. 새로운 것, 젊었던 것도 시간과 함께 낡고 늙어가는 것이지. 말씀처럼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어느 날 아버지 앞에 홀연히 서게 되겠지. 너무나 확실한 삶과 죽음의 진리를 왜 이리 쉽게도 잊고 사는 것일까? 주님 앞에 서는 날, 남는 것은 사랑뿐이지. 주님을 향한 그리고 곁에 두신 사람들을 향한 순수한 사랑, 그 사랑만이 영원히 별처럼 빛나며 남아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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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