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혜 박사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게 목회의 길을 갔던 형부가 작년 말로 은퇴를 했다. 형부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언어로 직접 표현할 기회는 없었지만 형부는 형부라는 관계를 떠나 한 목회자로서 내가 많이 존경하는 분이다. 믿음 좋은 평신도와 결혼한 딸이 갑자기 사모의 길을 가게 생긴 것이 마땅치 않은 장인의 눈치도 봐가며 처가에 살면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형부는 경상도 구석으로 첫 목회를 하러 갔다. 그 때 알게 된 것이지만 서울에서 목회를 하려면 신학대학원 성적이 우수해야 한다고 한다. 형부는 졸업할 때 제일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자청해서 시골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33년 목회생활을 마치고 은퇴를 했다. 교인들 대다수가 연세 든 노인들이어서 설교 수준도 맞추기 어려웠을 것이고 대화 상대 찾기도 힘들었을 텐데 노인 분들을 주님 사랑으로 섬기며 외로운 목회를 하셨다.
손가락 끝에 물도 안 묻히며 살 줄 알았던 언니는 형부의 건전한 생각에 마음이 끌려서 결혼을 했지만 본의 아니게 목사 사모가 되어 시골 아낙네가 되어 사는 것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언니는 시간이 나면 큰 언니들이 사는 서울 나들이를 하는 것이 작은 기쁨인 것 같았다. 시골에서 나서 성장한 아들 둘이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어서 지방대학을 졸업한 것이 언니 마음에는 힘들었다. 교단에서 들어준 소액의 은퇴자금 외에는 준비된 것 없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책임지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요즘 말로 대책이 없는 목사 남편 때문에 언니는 자기가 상대적으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약도 오르고 화도 나는 것 같았다. 아직 5년 더 목회할 수 있는데도 형부는 젊은 후배들도 목회자리가 없는데 본인이 빨리 물러나야 한다며 굳이 은퇴를 서둘렀다. 평생을 기도하며 말씀 준비하는 것이 몸에 배어서 은퇴 후에도 매일 성경 연구하고 설교 작성한다고 언니에게 잔소리 듣던 형부는 은퇴 후 한 달 만에 교회에서 상처 받은 몇 분하고 주일에 문을 닫는 카페에서 카페교회(?)를 시작하셨다.
세상 직장 일을 하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살았으니 빨리 은퇴하고 여유 있게 여행도 다니고 남은 삶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은퇴를 하면 여생을 위한 경제적인 준비를 탄탄하게 해놓았어도 삶의 무기력함, 무료함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를 섬기던 목사님들도 은퇴를 하면서 깔끔하게 교회를 떠나는 것이 어려운 것 같다. 특히 본인이 개척해서 평생을 섬기던 교회를 떠날 때나 오랜 시간 목회하면서 부흥된 교회를 떠날 때는 아름다운 모습보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인간적인 욕심이 보이기도 한다. 이해하자면 몸과 마음을 다해 오랜 시간을 섬기던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쌓인 정, 또 목회의 결과로 이룬 성과를 다 내려놓고 다음 세대에게 바톤을 넘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으리라. 그래서 교회에서 세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지도 모르겠다. 세습은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다는, 아니 주기 아깝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결과다.
많은 시간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젊은이들이 떠난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인 형부가 존경스럽다. 마을 사람들에게 “구성예수”라는 별명을 얻은 형부가 존경스럽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화려한 은퇴식이 없어도, 그리고 보장된 은퇴자금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주님의 칭찬을 확실히 들을 것인 형부가 존경스럽다. 맡기신 분이 누구인지, 떠날 때가 언제인지 늘 주인되신 분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기 때문이다. lpyun@ap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