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혜 박사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내가 학교에서 맡은 일은 강의도 있지만 행정 일을 겸한 일이다. 늘 행정 일이 바빠서 학문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앉아 있는 시간이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연구 프로젝트를 할 생각은 아예 못하고 지냈는데 몇주 전에 “고난이 삶에 주는 유익”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개발하면 좋은 강의안을 선발해서 후원을 하겠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다른 때 같으면 별 생각없이 “연구? 좋겠다” 그러면서 지워 버렸을 텐데 그 날의 이메일은 눈길을 끌었다. “고난”이라는 주제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가 오랜 시간 동안 부대끼며 생각해 온 주제여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바쁜데 준비하려면 시간도 많이 필요할거고 열심히 준비해서 제출한다고 선택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해보고 싶은 것인지. 결국은 몇 주간을 완전히 nerd(공부벌레) 수준으로 도서관에 틀어 박혀서 강의안을 준비했다. 가을이 왔다고 파란 하늘이 손짓을 하는데도 못 본척하느라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품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 중 하나가 인간의 삶에 있는 고난과 하나님의 연관일 것이다. 왜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인지, 때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악을 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허용하시는 것인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미리 막으실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물어온 것이다. 고난의 해석은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떻게 우리 삶에 닥치는 고난을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고난이 유익이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의 말처럼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백성 하나 보호하지 못하는 것 같은 무능력한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며 등을 돌리기도 한다.
인생의 길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고난을 통해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려면 주변의 사람들은 고난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마음으로 고난을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교과서적인 대답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고난은 머리로 겪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당하는 어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설프게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을 위로하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너무 좋은 집사님을 너무 사랑하셔서 일찍 천국에 데려 가셨나 봐요,” “경제적으로 어려움 당하는 것이 건강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거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거예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안하느니만 못하다. 차라리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백배 나을 것이다.
고난에 대한 강의안 준비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지난 주간은 마치 고난 실습을 시키듯이 마음을 빼앗는 일들이 연이어 생겼다. 아들이 대학원으로 가면서 데리고 간 강아지를 갑자기 큰 개가 와서 무는 바람에 여러 군데를 꿰매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목요일 낮에 연락이 왔다. 다행히도 내장까지는 상하지 않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는 타주에서 온 선교사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제일 앞에서 가고 있던 내 차를 뒤 차가 연속으로 세 번이나 받는 사고가 있었다. 삼중 충돌이어서 많이 놀랐다. 감사하게도 가운데 낀 차는 많이 부셔졌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연속 세 번을 받는 바람에 걱정이 되었던 목, 등의 통증도 심하지 않다. 고난에 대해서 연구만 하지 말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피부로 느껴 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 눈동자 같이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이제 그만 있었으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lpyun@ap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