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수 목사 (남가주사랑의교회)
한국어 사전은 콤플렉스(complex)를 ‘억압된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강박 관념’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원래 콤플렉스라는 말은 스위스 정신의학자 칼 융(Carl Jung)과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였던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에 의해 주로 심층심리학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콤플렉스가 지나친 사람은 자기부정을 하고 더 심한 경우에는 병에 걸린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사회는 콤플렉스 사회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메시아 콤플렉스, 학교 성적 콤플렉스, IT 콤플렉스, 영어 콤플렉스, 성공 콤플렉스 등등 다양한 콤플렉스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중에 한국인들이 쉽게 빠지는 콤플렉스는 일류 콤플렉스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자녀가 반드시 일류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학벌이 좋으면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얻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학벌이 성공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명문대 입학은 희생적으로 자녀 뒷바라지를 한 부모가 받아야 할 당연한 보상이라고 여깁니다. 혹시 자녀가 부모의 기대에 못 미쳐서 삼류대학에 들어가면 부모는 자존심이 상하여 기가 죽습니다. ‘창피해서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하며 동창회와 같은 모임에 불참합니다.
또 다른 한국인들의 콤플렉스는 외모 콤플렉스입니다. 한국인들은 의상과 유행에 상당히 민감합니다. ‘옷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능력이다’라는 말처럼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유행에 뒤처지는 옷을 입거나 명품 옷을 입지 않으면 차별받는다는 피해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포들이 한국에 가면 옷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부모님의 체면 때문에 먼저 옷부터 사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제 외모 콤플렉스는 옷에서 성형으로 옮겨갔습니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을 얼짱, 몸매가 좋은 사람을 몸짱이라고 부르며 루키즘(lookism)에 빠져서 마음에 안 드는 외모는 과감히 의술의 힘을 빌려 고칩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필요해서 성형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모에 대한 집착이 부르는 성형시술의 남용 때문에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성형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에는 외모 지상주의로 흘러가는 한국에 대한 비난이 섞여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서울의 지하철마다 여기저기 크게 붙어 있는 성형외과 광고를 보면 이런 지적이 틀리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콤플렉스가 크리스천들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들이 은사 콤플렉스, 영성 콤플렉스, 기도 콤플렉스, 결혼생활 콤플렉스, 성경 지식 콤플렉스, 모태신앙 콤플렉스, 직분 콤플렉스, 등등 낮은 자존감 때문에 나를 남과 끝없이 비교하게 하고 그 결과 수많은 콤플렉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 모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자유인으로 사는 길은 없을까요? 먼저 콤플렉스는 사단이 주는 속임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의 주특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낮은 자존감의 콤플렉스에 빠지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콤플렉스에 묶여서 무력한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콤플렉스가 끝없는 남과의 비교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약2: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외모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람은, 그 대상이 ‘나’이든지 ‘남’이든지, 범죄자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걸작임을 부인하는 콤플렉스는 불신앙입니다(엡 2:10).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창조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며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아닌 ‘남’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보다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귀한 자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한다’(사43:4)고 말씀하실 정도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