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령 목사(캄보디아선교사)
[월] 두 종류의 근심(고후7:2-16)찬420장 바울은 두 종류의 근심을 비교함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어떻게 따르게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10)인 경건한 슬픔은 신자의 여정에 항상 필요한 영양소입니다. 이 근심으로 신자는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아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익이 생깁니까? 1)하나님에 대한 간절성 곧, 진지한 마음 2)변증 곧, 자신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함 3)분함 곧, 의분(indignation) 4)두려움 곧, 영적 경각심(alarm) 5)사모함 곧, 인내로 갈망함(longing) 6)사모 곧, 관심집중(concern) 7)열심 곧, 의가 나타나기를 진지하게 기다림(readiness to see the justice done)이 생깁니다. 둘째, 사망에 이르는 근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으로 시작해 사망으로 마칩니다. 감사치 않는 마음과 태도와 말은 경건생활에 치명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마침내 생명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화] 성령의 자유(고후3:12-18)찬175장 바울이 본 새 언약의 영광에 참예함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첫째, 모세가 본 영광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영광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듯 그 영광을 수건 없이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둘째, 성령은 자유의 영이십니다. 주가 영이란 말은 승천하신 주님이 높으신 신분으로 성령 안에서 일하시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모두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는 주님을 증거하러 오신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성령의 자유 곧, 영적 해방을 가리킵니다. 셋째,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가게 하십니다. 죄에서 죄로, 사망에서 사망으로 떨어지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믿음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가 점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주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자의 소원이 돼야합니다. [수] 만족(고후3:5)찬257장 새 언약의 탁월함을 주장하는 사도는 하나님께로 오는 만족을 누리기를 어떻게 가르칩니까? 첫째, 율법과 복음,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함으로 비교적 우월성이 아니라 복음의 원천적 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모세, 아론 여호수아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를 그림자와 실체로 비교한 것처럼 복음이 없는 옛 언약은 더 이상 생명 없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만족이 어디서 오느냐에 관한 근원적 문제로 나아가게 합니다. 둘째, “자기냐, 하나님이냐?”라는 문제는 에덴동산에서부터 벌써 일어났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눈은 떴으나 자기에게서 나온 분별력은 사망을 가져왔고 생명나무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먹은 신자의 분별력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참 만족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만족케 한 것만이 신자를 만족시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그 만족으로 충만합시다. [목] 성령(갈5:16)찬180장 정상적인 신자의 삶의 실마리는 성령과 육체의 선택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성령을 따르면 생명의 열매를 맛보나 육체를 따르면 사망을 맛봅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의 선택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 우리는 그냥 있어도 육체의 부패성을 따르는데 익숙하여 항상 사망의 열매인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15가지) 등을 나타냈습니다. 둘째, 그러나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을 따를 때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도록 돼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속의 육체의 소욕이 강할 때 그 열매를 맺는 것이 경험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령을 따라 행함이 우리가 집중할 일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따라 가기만하면 육체의 열매는 자연히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약속된 영광스러운 경험입니다. [금] 자기 일을 살피라(갈6:11-18)찬213장 그리스도인의 영적생활은 자기를 살피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8). 첫째, 인간의 부패성(정욕 혹은, 탐욕)은 언제나 성령의 소욕을 대적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씨를 심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육체를 심으면 사망, 성령을 심으면 영생(영생의 풍성함)을 반드시 얻습니다. 성령을 따르기만 하면 어떠하든지 반드시 영생의 열매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둘째, 자기의 일을 살펴야 합니다(4). 율법과 믿음의 첨예한 교훈을 강하게 주장한 바울 복음은 신자의 실제 삶에서 환경이나 다른 조건보다 그 자신에게로 나아가게 합니다. 자아, 자기, 육신, 육체로 표현된 죄악의 부패성(살크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죄의 일을 보면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 일을 살펴 스스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청교도들의 경건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영적 승리를 잘 알았습니다. 나의 갈 길은 자아부인에 집중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토] 율법(갈3:24)찬235장 율법을 초등학교 교사로 비유한 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율법과 복음은 구약과 신약, 모세와 예수님을 대조해 그 불연속성을 설명합니다. 이 말은 구약의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복음으로만 구원받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죄를 처리할 뿐 아니라 율법의 요구인 의, 인, 신을 완성하는 독특성을 가집니다. 둘째, 고등교사가 아니라 초등교사로 비유한 것은 율법을 통할 때 복음으로 쉽게 나가는 사실을 그림 그리듯 잘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있을 때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되고 전적 무력함을 인정해 자기 노력의 불가능성을 알고 항복하게 되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성령은 초등교사의 자상한 가르침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가십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령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