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LA대흥장로교회)
[월] 떳떳한 성도 (마26:57-68) 63절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기 위한 유도심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난처한 상황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우리도 어떤 위기가 온다해도 정체성과 믿음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마5:14)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것을 꽁꽁 숨기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밝히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성도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그들. 주님은 ‘나는 주 예수의 사람’이라고 밝히기를 원하십니다.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을 밝히는 성도를 우리 주님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10:11-31).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임을 항상 밝히며 떳떳하게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화] 성령 따라 사는 자세 (마26:69-75) 75절은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자신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통곡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신없이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는 닭이 우는 순간 주님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지 깨닫게 되고 그것 때문에 통곡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길로 가는 성도는 복된 성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자기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증거이자 그를 사랑하시는 표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성도들 심령 속에 내주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인도해주십니다. 죄를 범하고 말씀이 생각나 회개하는 일,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어 확신하시고 최선을 다해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신앙자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 회개와 후회 (마27:1-10) 3, 4절, 주님을 판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사형당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주님을 판값으로 받은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벨레데이스’는 후회하다의 의미입니다. 회개에 해당하는 ‘메타노에오’는 삶의 전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지금 가룟유다의 회개 아닌 후회는 죄의 결과에 대한 감정적 후회일 뿐입니다. 회개와 후회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도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후회에 그치는 사람이 돼서는 안됩니다. 회개는 사람이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의 결과물입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야만 자기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을 의지해 후회가 아닌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므로 다 영생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목] 은혜의 보좌 앞에서 (마27:11-23) 11절은 주님께서 마침내 총독 앞에 서서 심문받기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라고 기록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께 재판을 받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또 마지막 날에는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빌라도처럼 감히 절대적인 심판권을 지니신 주님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빌라도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처지와 주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주님을 함부로 정죄하고 사형에 처함으로써 영원한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히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일 뿐 주님 [금] 자기 죄를 직고하리라 (마27:24-26) 24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는 자신의 노력이 군중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예수를 처형하기로 결정하고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처형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일은 전적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우매한 군중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따라 유대인들과 야합해 사형을 언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핑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자기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죄를 숨기거나 핑계하지 못합니다(롬14:12).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행위를 일일이 살펴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선 자로 살면서 죄를 멀리 해야겠습니다. [토] 주님이 받으신 고난 (마27:27-31) 29, 30절은 로마 군병들이 주님을 조롱하는 장면입니다. 시편말씀대로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수백 명이 둘러싸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그 머리를 갈대로 쳤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이렇게 수치와 조롱을 당하신 목적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그보다 몇 만 배 더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초라한 죄수의 모습으로 온갖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재림하실 때는 하늘영광과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처럼 의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과 멸시를 당한다면 나중에 하늘의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 자랑하고 고난도 기쁨으로 받고 우리 주님을 위해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