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가정예배

2012년 6월 11일- 16일

전화령 목사(브니엘장로교회) [월]십자가 사랑 (마26:1-5) 주님께서 십자가수난을 네 번씩(2절)이나 거듭 예고하신 이유는 결코 십자가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과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를 어길 경우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2:7). 이는 인간이 선악과언약만 지키면 영원히 살 수 있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언약을 어겼고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그처럼 허무하게 죽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한 번 정하신 언약을 파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죄한 자로 하여금 인간을 대신해 죽게 하고 인간은 회개를 조건으로 구원얻게 하시는 새로운 구속의 법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알려주셨으며(창3:15), 십자가사건을 통해 인류구속을 완성시킨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감사합시다. [화]두 마음을 품지 말라 (마26:6-16) 본문을 보면 가룟 유다는 스스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그를 먼저 유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여차하면 주님을 배신할 준비가 늘 돼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주님을 따른 것은 주님이 유대의 왕이 되면 자신도 한몫 잡아보려고 주님을 좇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이 세상 왕권과는 상관없는 천국 진리를 가르치시자 그때부터 공금을 횡령하기 시작했고(요12:5,6),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리라고 가르치자 더 이상 주님께 얻을 것이 없다고 결론내리고 배신을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었던 가룟 유다의 배신은 필연적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주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려다보면 반드시 하나님을 배신하게 돼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그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마음을 성결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약4:8). [수]성찬의 은혜 (마26:17-30) 본문은 주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며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먹으라”고 하셨고 잔을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의 대속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그 은혜에 참예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미리 준비해놓으셨듯이,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대속 구원의 은혜를 이미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이 은혜를 받아서 먹고 마셔야 그 은혜가 내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대속 구원의 은혜가 아무리 크고 놀라운 것이라도 그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고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목]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마26:31-35) 32절은 주님께서 부활하시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갈릴리는 가나안인 시몬과 가룟 유다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들의 고향이자 어부로 지내던 곳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당신께서 붙잡혀 처형당하시면 고향으로 도주해 다시 어부 일을 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되돌아간 제자들보다 먼저 가셔서 그들을 위해 고기와 떡을 구워놓고(요21:1-14) 타락한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과 그들의 사명을 되살려주신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만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미혹에 빠져 세상 어두운 곳에서 방황할 때도 먼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리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도 자식의 타락현장에 먼저 가서 기다려주지는 않습니다. 그 현장에서 끌어내리려고만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자녀들이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그곳에 계셔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얼마나 놀랍고 감사합니까? [금]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마26:36-46) 39절에서 주님은 제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잔은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주님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젊은 나이의 주님이 치욕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피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결코 자기의 뜻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끝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심으로써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결코 자기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키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셨다” 우리도 바울과 주님의 태도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토]혈기는 사단의 도구 (마26:47-56) 51절은 제자 중 한명이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제자를 베드로라고 기록했습니다(요18:10).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분노를 참지 못해 칼을 휘두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베드로의 혈기는 하마터면 주님의 뜻을 망칠 뻔한 우매한 행동이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반항하면 죽이려고 나온 로마 군병들이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주님이 골고다언덕이 아닌 겟세마네에서 돌아가실 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혈기있는 행동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훼방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결국 사단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목적으로 격동시킨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혈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약1:20). 성도가 화를 내면 후회할 일만 새깁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언제나 온유한 말과 유순한 대답으로 지혜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