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령 목사(브니엘장로교회) [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욥11:7-9) 찬34장 고난 속에 놓인 욥이 만난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를 완전히 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첫째, 그는 하늘보다 높으십니다(8). 눈에 보이는 하늘보다 더 높은 삼층천에 계신 하나님은 가장 높으시고 거룩하십니다. 그가 낮아지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를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세계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지존자의 그늘에 거하는 자가 복됩니다. 둘째, 스올보다 깊으십니다(8). 그는 높으시며 동시에 깊으신 지혜를 가지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서며 생각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정직히 서는 자가 진정 지혜자입니다(시139:). 셋째, 땅과 바다보다 크고 넓으십니다(9). 피조물 중 가장 크고 넓은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측량할 수 없는 역사를 이루시는 분 앞에 사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그를 향해 찬송과 경배가 생깁니다. 전능자를 상대로 겸손히 살아갑시다. [화] 엘샤다이 하나님 (창17:1-9) 찬53장 아브라함에게 전능자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입니다(1).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실망한 아브람에게 전능자로 나타나신 후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을 요구하심으로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시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둘째, 열국의 아버지로 살라하셨습니다(4). 또 구속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형으로서 열국의 아비로서의 역할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온 세상의 자기백성으로 제한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온 교회의 머리로서 영존하신 아버지로 오셨습니다. 셋째, 개인적인 교통을 원하셨습니다(8). 그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자로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오직 언약의 중보자인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한 교제가 일어납니다(요17:). 엘샤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위해 주를 더욱 의지합시다. [수] 구원하시는 하나님 (시40:1-4) 찬288장 좌절 속에 있는 다윗을 친히 구하신 하나님은 절대 구원자이십니다. 그의 구원은 어떠했습니까? 첫째, 인격적이십니다(2).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부르짖는 다윗의 애절한 소리를 친히 들으시고 응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리고 견디는 태도를 아시고 구체적으로 응답하신 인격적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그의 빠져가는 약한 발이 굳게 설 수 있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2). 성도가 설 수 있는 믿음의 발판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그 안에서만 참 평안과 안전이 있기 때문에 다음 스텝을 뛸 수 있습니다. 실제로 행하시는 그 분만이 진정 성도의 구원주이십니다. 셋째,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4). 구원으로 마치지 않고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새노래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경외신앙으로 그를 경배하고 이웃에게 그 하나님을 선포하는 자리로 나가며 풍성한 구원의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목] 불변하신 하나님 (말3:5-6) 찬408장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의 불신실한 상태를 심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의로 심판하신 분이십니다(5). 누구를 심판하십니까? 점치는 자, 간음자, 거짓맹세자, 소자를 압제하는 자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떠난 그들의 모든 행위는 진리를 떠났기 때문에 신실치 못한 생각과 행실 때문에 방황하는 자리에 떨어져있습니다. 영적음행으로 처절한 자리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심판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둘째, 불변하신 하나님이십니다(6). 그러기에 그분과 그의 말씀위에 선 자는 근본을 알며 진리 위에 서서 이 생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불신실로 채워진 세상에 신실하신 그 분과 그의 언약을 붙들고 겸손히 나아갑시다. 변태로 채워진 우리 시대에 견고하게 설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은 오직 불변하신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금] 야베스의 경건(1) (대상2:1-55) 찬486장 대상2:55에서 야베스의 경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갈렙 가문의 살마 자손들 곧 서기관 종족이 야베스에 살았던 기록은 야베스의 이름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 도시가 야베스로 명명됨은 야베스의 경건이 특이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 그리고 시험을 당할 때 진정 기뻐하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야베스에게 현실화 됐습니다. 이 고난이 연단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받는 기둥같은 경건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약1:1-2). 둘째, 레갑의 경건과 관련된 인물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평생 독주를 입에 대지 않고 여호와를 섬기며 신앙의 지조를 지킨 레갑 가문의 경건과 버금가는 열매가 야베스에게 나타난 것처럼 보입니다. 나 한 사람의 경건 능력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을 은밀하게 준비하셨다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역사의 현장에 드러내십니다. [토] 야베스의 경건(2) (대상4:1-43) 찬495장 남쪽 유다에 초점을 맞춰 언약백성의 우월성을 강조한 역대기 기록은 구원계시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보여주기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계시입니다. 첫째, 야베스는 누구인가? 유다지파의 족보에 고통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야베스가 나타납니다. 그는 만성적 고통과 근심 속에서 작은 자로 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불리한 환경에서 위대한 기도를 배웠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불리한 환경과 고난의 자리라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야베스는 무엇을 구했습니까?(11) 그는 언약 백성의 신분을 주장하기보다 자기의 현 상태에서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주의 뜻이라면 이것저것 하려는 태도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기도제목, 지경확장과 근심과 고통에서의 자유를 구했습니다. 주께서 응답하신 것은 그의 기도가 산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