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LA대흥장로교회) [월]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마20:17-19) 19절엔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당하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나옵니다. 주님은 원하기만 하면 그런 모든 고난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8).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 고난의 잔을 마시고 묵묵히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말입니다(사53:7).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대해 무조건 ‘예’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개의치 말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만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서면 무조건 받아들이고 따라갑니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이 단순한 신앙자세가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됩니다. [화]고난의 잔 (마20:20-28) 20절에서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했다고 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요한과 야고보를 말하고, 그들의 어미는 살로메입니다. 그녀의 부탁은 주의 나라가 임할 때 두 아들을 주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때 22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 잔은 고난의 잔이요 죽음의 잔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축복만을 구하고 영광만을 구하는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이 대답 여하에 따라 우리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모양만 성도인 사람과 내용까지 성도인 사람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자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받기 위해 고난에도 기꺼이 참예해야 합니다(롬8:17). 자녀이거든 주와 함께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수] 지금의 기회 (마20:9-34)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두 소경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30절). 그 외침은 자신들 목소리가 예수께 전달되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이기도 했겠지만 그들만이 안고 있는 아픔을 토해내는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그 외침 속에 예수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이 배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합니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나 여건 때문에 불행한 줄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곧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가르칩니다(고후6:2). 두 소경처럼 주어진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님오신 후 후회하지 말고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고 부르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목] 쓰임 받는 종 (마21:1-11) 3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을 좇아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그 새끼와 함께 끌고 오려 할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은 일체 하지 말고 다만 “주가 쓰시겠다”고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주’(Lord)라 호칭하신 것은 성경에 여기뿐입니다. 여기서 ‘주’는 주인이나 소유주를 가리킵니다. 마28:18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이 말씀처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주’의 개념 속에서 우리 성도 개개인에 대한 소유권도 포함돼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주님은 만물의 창조자로써 또한 소유주로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임의로 주관하는 분이시며 그분이 하시려는 일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그 분께 쓰임받는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금] 깨끗한 성전 (마21:12-17) 본문은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두 번 있었습니다. 본문 외에 요2:13-22에 기록된 것은, 공생애 사역초기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미 주님의 사역초기에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성전이 장사꾼들로 들끓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종교가 얼마나 세속화돼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가 되기도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면서 성전은 늘 거룩하게 유지 보전돼야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교훈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3:16).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몸을 함부로 사용함으로 죄와 불의로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토] 무화과나무의 저주 (마21:18-22) 19절에 보면 주님께서 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아침 일찍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혹시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갔지만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성도는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함께 갖춰야한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잎과 열매를 동시에 맺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무성한 잎을 보고 열매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할 정도로 신앙의 부흥이 있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성전정화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내적으로 경건의 능력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의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 능력도 갖추기 위해 늘 경건의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