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가정예배

2012년 4월 1일 - 4월 7일

권영국 목사(LA대흥장로교회) [월]끝없는 용서 (마18:21-35) 22절은 용서의 횟수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횟수를 제한하지 않는 끝없는 용서를 통해 그 당시 용서에 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는 말의 원어가 ‘보내버린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일체의 것들을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하신 것을 본받는 게 우리도 마땅합니다. (사43:25)용서했다고 말하면서도 그 죄를 마음속에 담고 사는 사람은 완전하게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사44:22). 온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사라지면 곧 푸른 하늘이 나오고 우리가 그 구름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형제들의 허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와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골3:13). [화]신앙적 편견 (마19:1-12) 3절에 바리새인들이 이혼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한 사실이 나옵니다. 당시 이혼문제는 논란의 소지가 많았습니다. 신24:1은 아내를 취해 데려온 후 수치되는 일이 그녀에게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집에서 내보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수치되는 일’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해 예수님을 논쟁에 휘말리게 하고자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혼문제 자체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전통을 중시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가르침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신앙적 고정관념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편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는 모든 기준을 하나님 말씀에 둬야 합니다. 칼빈의 주장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거나 웨슬레의 가르침을 성경보다 중시해서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 안에서 서로를 배척하지 말고 독선과 오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수]어린아이와 같이 (마19:13-15) 주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은 제자들을 향해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14절)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이미 마18:3에서도 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어린아이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는 부모에게 절대 의존적입니다. 둘째, 부모의 말에 절대 순종합니다. 셋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단순합니다. 주님은 이런 어린아이들의 특성을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질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가 부모를 절대 의지하듯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고 겸손하게 가르침을 단순한 마음으로 받는 자, 이런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목]잘못된 구원에 접근 (마19:16-22) 16절에 한 유대관원이 주님께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구원관을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이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수행하고 자선도 베풀었습니다. 본문의 부자청년도 율법을 행하고 자선을 베푸는 일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로망 롤랑은 마하트마 간디를 “가장 자연스런 그리스도인”이라고 평했습니다. 이는 간디가 그리스도와 닮은 사상과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이유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면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롬1:17).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금]사람의 기준과 틀린 구원 (마19:23-30) 25절은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주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소스라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에서 축복은 “부요, 성공, 장수 등을 위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부자는 곧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로 인식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통념을 완전히 깨트리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게 유익하던 것’ 가운데는 ‘부’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는 그의 이 고백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철저히 가난하게 되는 것조차 기쁨으로 여긴 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다 부자가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구원은 외견상 드러나는 것에 판단될 수 없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토]선택된 사람들 (마20:10-16) 4절을 보면 제 삼시까지 장터에서 놀고섰는 품꾼들에게 포도원주인이 상당하게 품삯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들은 원한다고 임의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주인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도가 되고 또 일꾼이 된 것도 이와 같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예정, 부르심의 근거라든지 그 기준에 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왜 베드로나 마태 같은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들이 선택됐다는 점과 우리도 그들처럼 선택됐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불러 일꾼 세우신 주의 은혜를 감사하고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택하사 거룩한 직임을 맡기셨으므로 아무도 자기를 내세우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저 충성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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