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가정예배

2012년 2월 20일 - 2월 25일

권영국 목사(LA대흥교회) [월] 가나안 여인의 호소 (마15:21-27) 22절,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소리지릅니다. 이는 자신이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떠한 자격도 없지만 오직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가엽게 여겨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이 여인의 호소는 성도의 믿음생활의 의미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믿음생활이란 도저히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임에도 은혜를 바라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삶입니다. 세리가 감히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슴만 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던 것처럼(눅18:13),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는 삶이 성도의 믿음생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도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하고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구하는 이런 믿음생활을 계속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천국으로 끝까지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화]믿음이냐? 소원이냐? (마15:28-31)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여인의 소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소원은 흉악하게 귀신들린 그녀의 딸이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반드시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딸을 위한 소원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원은 오직 믿음에서 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결코 진정한 소원을 가질 수 없으며, 소원이 없으니 당연히 이룰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자들만이 참된 소원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이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소망을 따라 살아감으로 마침내 참된 소망을 이루는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수] 현실의 문제 (마15:32-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32절)”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의 영적인 문제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에 가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 땅에서 당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 곧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셨으며 친히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교회에서, 혹은 천국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극히 냉정한 이 현실 속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믿음은 적용되고 구체화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핑계로 현실을 도외시하지 말고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현실의 문제에 대처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목] 명백한 표적 (마16:1-4) 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간 들어갔다 나와서 이방 땅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욘2,3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되심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적은 바로 역사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그 이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가운데 진행되어진 인류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만이 참 구원자이시고, 또한 인간의 역사는 인류 구속의 역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에 나타난 명백한 표적을 보고도 다른 표적을 구한다면 그것처럼 우매한 일도 없습니다. 역사(history)를 ‘예수님의 이야기’로 믿고, 다른 표적을 구하지 아니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 구하라 (마16:5-12) 9, 10절에서 예수님께서 떡의 문제로 인해 근심하며 의논하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무한한 능력을 체험하고서도 고작 강가에 두고 온 얼마되지 않는 떡 때문에 근심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떡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들을 배불리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하찮은 떡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래서 구하기만 하면 모든 필요를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으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구하지 못하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늘 염려와 근심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요16:24). [토]나의 고백 (마16:13-20) 제자들을 향해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13절)고 물으셨던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고 재차 물으십니다.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 자신의 생각과 신앙을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답변에 따라서 이제껏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들의 신앙적수준이 평가될 뿐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미래까지도 결정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없다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이 고백을 여러분 자신이 할 수 없다면 그 사람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이 나의 신앙고백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실 때, 당당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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