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대흥교회) [월] 떠나시는 주님 (마9:1-8) 돼지떼를 손해 본 가다라 주민들이 주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합니다(마6:34). 주님은 일언반구 없이 조용히 떠나십니다. 세상의 권세자들과 달리 주님은 백성이 원치 않으면 벌주는 대신 스스로 그곳을 떠나시는 온유한 왕이십니다. 주님은 일찍이 산상수훈(마7:6)의 교훈대로 은혜와 진리를 거부하는 무지한 자들로부터 머무르지 않고 떠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면 인간에게는 큰 불행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생명과 구원과 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떠난 개인, 가정, 교회, 국가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너무 무지하고 완악해 주님께서 나를 떠나시는 일이 없도록 주님을 늘 나의 왕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화] 마태의 전도 (마9:9-13) 회심하고 주를 영접한 마태가 그 친구들을 불러모아 주와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10절). 그는 세리 동료들과 작별하는 의미로 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일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의미로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전도했을 것입니다. 이는 세리들 중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이 많아 그리스도께서 ‘세리의 친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사실을 통해서 확인됩니다(마11: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이요 소유된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는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 때문이었습니다(벧전2:9). 여러분은 얼마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사십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수] 인본주의적 금욕주의 (마9:14-17) 금식의 궁극적 목적은 육체의 탐심을 죽이고 죄를 회개해 새롭게 변화된 신앙을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욕망을 금식으로 없애려는 인본적인 금욕주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위배됩니다. 육체의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기 경건을 보이려고, 인간의 욕구를 모두 악한 것으로 여기고 억누르려고 하는 금식은 주의 뜻과 어긋난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행위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부릅니다(골2:20). 이와 같은 것으로는 죄와 욕구를 없앨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골2:21,22). 주님은 금식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성령을 좇아 육체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 기독교적 금욕의 방법이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생활이 곧 모든 더러운 욕망을 이기는 길입니다. [목] 구원의 확신 (마9:18-26) 20, 21절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이 그리스도 몰래 그 뒤에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진 내용입니다. 혈루증이란 하혈을 계속하는 몹쓸 병입니다. 이런 여인이 자기를 만지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아시고도 예수님은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옷가를 만진 사람이 아닙니다. 혈루증보다 더 부정한 죄인인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믿음으로 섭취하고 성령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한 몸이 됐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장된 것이요 성령의 세례로 확증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도 아직 구원의 확신을 지니지 못한 성도들이 계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겉옷 정도를 스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과 연합된 존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 사랑의 표현 (마9:27-34) 주님은 특히 앞 못보는 소경들을 치유하실 때 더욱 세심한 정성과 방법을 쓰셨습니다(29절). 침을 뱉어 진흙을 그 눈에 붙이는 방법까지 쓰시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상대방에게 ‘낫는다’, ‘치료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두 눈을 볼 수 없는 자들이기에 일반인과는 다른 세심한 사랑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베푸는 사랑의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무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베풀 때 성도는 세심하게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고 모멸감이나 수치심이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행해야 마땅합니다. 불쌍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산 제사입니다(히13:6). 그러나 그 방법과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 사랑을 주는 과정도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토] 하나님의 일꾼 (마9:35-38) 37절은 그리스도께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없다고 하시며 천국사역의 애로사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지만 정작 그분과 같이 사역하는 일꾼은 열두 제자와 70여 명이 전부였습니다(마10:5, 눅10:1,2).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표적행하는 것을 구경하고 병고침 받고자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일꾼은 적고 관망하는 관람객들만 넘쳐나는 형편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신앙수준의 표시입니다. 또 열심히 그 맡은 직분에 수고하는 성도에게는 사단이 시험할 틈도 없습니다. 열심히 이 땅에서 축복의 씨앗을 심는 성도만이 천국의 풍성한 상급을 이 땅에서도 또 천국에서도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