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터성경사역원 LA 지부장
하늘소망교회 담임
월: 받은 사명 막 1:38 찬 213장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함”(눅 4:4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짧게 줄여서 표현한 것이 오늘의 요절 마가복음 1장 38절에서 말씀하신 “전도”입니다. ‘전도’는 ‘도를 전한다, 길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 자신’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목적(사명)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인지를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우리의 사명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로를 선전하는 것’입니다.
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 막 2:17 찬 252장
마가복음 2장에는 특별한 두 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 병자(마 9:2) 이야기이며, 두 번째는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는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즉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 간에 짓는 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피해자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까지도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간의 해결과는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원죄(original sin)는 인간 사이에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죄가 사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죄로 이미 죽은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고백하며 회개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용서해 주십니다.
수: 참된 안식 요 5:17 찬 412장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이후 2번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안식’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병자를 고치신 날이 바로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노동’을 힘겹게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 병자를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안식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 누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셨던 일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피조물이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피곤하셔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만 붙들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늘 발견해 내고, 그 예수님을 끝까지 의지해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선포하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예수님은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구주!”
목: 업그레이드 된 율법 마 5:21-22 찬 561장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시작 후 2번째 유월절에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그 후 다시 갈릴리로 오셔서 ‘갈릴리 2차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이때 베푸신 설교 중 한 장면은 ‘산상수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에서 시작하는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까지 이어지고,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느라”(마 8:1)에서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다고 기록하면서 산상수훈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내용은 구약에서 주신 율법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제어합니다. 왜냐하면 미워해도 살인에 방불케 되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육신의 행위만 제어할 수 있었지만, 복음은 심령까지 제어합니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는 척’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루’라는 시간을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데 사용합시다.
금: 듣고 행하라 눅 6:47-49 찬 379장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과 믿음이 생각과 관념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믿음과 신앙이 너희 삶 속에서 실제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신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리고 “듣고 행하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도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복음과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듣는 것도 중요한데 들어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들은 복음’이 내 삶에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기대하지 않았던 당황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믿음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불신과 염려, 낙심과 불안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상황 앞에서 믿음을 선포합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Jesus, Unshakable Rock)”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우리의 믿음을 삶의 실제로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토: 접근을 넘어 접촉으로 마 8:2-3 찬 534장
산상수훈 후,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버나움으로 향하는 길에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동네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가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나병환자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거나, 군중들을 향하여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치지 않으면 그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병환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를 만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부정한 그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부정함이 예수님의 정함과 접촉되었을 때, 예수님의 정함이 나병환자의 부정함을 정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나병환자인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의 부정함을 체휼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서, 나병환자가 외쳤던 것처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외치며 예수님과의 접촉이 일어나야 합니다.
07.2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