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대흥교회) [월] 포도원 품군의 비유(마20:1-16)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군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일반 포도원의 주인은 자기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에 8시간 근무를 철저히 계산하지만, 예수님은 품군의 이익을 추구하시기 때문에 시간에 관계없이 일군을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 나중에 오는 자부터 품삯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불쌍한 자에게 가장 많은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8시간 일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되신 분께서 우리를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포도원 밭 안에서는 누구도 불평할 수 없이 모두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오늘도 나는 몇 시에 부름받은 일군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감사하며 사는 자들이 됩시다. [화] 예수님처럼 살기(마20:17-28)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삶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러왔고,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속물이라는 말은 "해방시키다 묶여진 줄을 풀다"라는 뜻입니다. 노예를 묶고 있는 줄을 풀어주시기 위해 "속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강한 자가 빼앗으며 사는 세상입니다. 스포츠의 세계는 1등만 알아주고 모두가 경쟁자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는 심포니의 세상입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작은 소리나 큰 소리나 모두가 하나가 되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맡기심을 기억하고 살아갑시다. [수] 눈 먼 거지를 섬기심(마20:29-34) 예수님께서 섬김에 대해서 말씀하시자마자 두 소경거지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고 사랑할 자의 범위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거지소경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술로 소원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할 바를 주님은 먼저 아시지만 믿음의 입술로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춥고 굶주린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서도 우리 사랑의 실천대상은 너무도 좁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돌아오지 못할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원합니다. [목] 승리의 입성(마21:1-11)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조롱하였습니다. 전쟁의 승리자는 군마를 타고 개선하지만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는 갑자가 모든 군중의 환영과 그들의 옷과 종려나무가지를 밟으며 개선했습니다. 나귀가 잘나서 뽑힌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쓰임 받은 것뿐이며 그 뒤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들어 쓰실 때 귀한 그릇이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잘나서 높이 들어 쓰인다는 착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실 때 비로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금] 성전을 청결하게 하심(마21:12-17) 성전청결사건은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 돈 바뀌는 자들을 쫓아내셨고 반면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당시 성전을 섬기던 제사장,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옳게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종교의 이름으로 착취하는 자들이었고, 예배의 방해자들이었으며, 주님을 분노케 하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성전을 위해서 제일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정말 위험한 사람입니다. 상업주의 물량주의적 철학이 나를 예배의 훼방꾼으로 만들고 나의 열심이 오히려 예배의 방해자로 둔갑될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날마다 바로 설 수 있도록 청결해야 할 것입니다. [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마21:17-22)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단순한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심이 아니라,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노이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나무가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 무화과나무는 현대의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림으로 찾으시는 것은 우리의 열매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은 저주의 대상입니다. 마지막으로 2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기 기도할 때에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