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령 목사(캄보디아선교사) whiteyou11@yahoo.com
[월]율법의 요구를 성취함(롬8:4)찬405장 율법과 복음의 갈등은 항상 신자의 큰 관심이었습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그 갈등을 해결합니다. 첫째, 율법의 요구가 우리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의인신을 뿌리로 나타난 율법(마23:23)은 본래 선한 것이지만 복음을 배격할 때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 율법의 표준은 신자가 성취할 목표입니다. 둘째, 이 요구는 성령을 따를 때 이뤄집니다. 이는 성령이 그 수준에 이르도록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고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 혼돈과 공허한 어두움 위에 운행하심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신 그 영은 육의 부패성을 다스리심으로 기어코 그 표준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 의인신의 성품을 이루는 성령님을 겸손히 따라갑시다. [화]영과 육의 싸움(롬8:5-8)찬393장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순간부터 시작되는 영육의 싸움은 무덤에 갈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싸움은 가나안 7족속처럼 신자의 영적성장을 위해 허락된 일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첫째, 먼저 이 영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우리 영혼이고 육은 모든 죄를 만드는 생산공장같은 부패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이 다툼이 바로 시도 때도 없이 기회만 되면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고 지적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동정하기 위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못하는 육의 부패성을 보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생각을 바로 잡고 성령의 생각을 택할 때 육의 생각을 이깁니다. 우리의 생각을 말씀에 붙들어 맵시다. [수]그리스도의 사람(롬8:9-11)찬518장 그리스도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도는 이 사실을 외적인데 두지 않고 내적인 곳에서 그 증거 를 보여줍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입니다. 중생하여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창조 때의 영광의 영(창1:2)이 친히 인도하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재창조인 구속의 영이십니다. 둘째, 그는 성령에 속한 자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여 그의 모든 것을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먹으나 마시나 모든 일을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 그 풍성한 부요를 누리게 하십니다. 셋째, 육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신자의 골칫거리인 육의 부패성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장사된바 됐습니다(갈2:20 롬6:6). 육체의 소욕이 이미 정리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거룩을 위해 믿음으로 싸워 신령한 승리를 누리게 하십니다. [목]산 자로 사는 길(롬8:12-13)찬204장 사도는 계속 신자의 삶에 귀한 지침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을 이루십니다. 둘째,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강한 소욕은 성령의 소욕이 커질 때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성경을 의존해야하며 성경의 사상 속에 나의 생각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셋째,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신자는 육체의 부패성을 따르는 작은 생각까지도 대적합니다. 결국 주님의 가르침대로 자아부인의 진리를 잘 배울 때 육을 이깁니다. 내가 주의 소유임을 인식하고 모든 일에 그의 주되심과 나의 종됨을 인정할 때 우리는 영적 승리를 누립니다. [금]하나님의 아들들(롬8:14-16)찬403장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사도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첫째,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라 했습니다. 악령의 인도로 죄를 범하던 그들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됐습니다. 둘째, 양자의 영을 받는 자입니다. 참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면 그는 이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입니다. 성령받은 자의 뚜렷한 증거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발적인 욕구에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아버지로 부를 마음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약한 자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그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 [토]고난의 복(롬8:17-18)찬495장 종교개혁자 존 칼빈 선생이 좋아했다는 본문은 고난의 복에 관해 말합니다. 왜 고난이 복입니까? 첫째, 영광을 받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이 복이란 사실에 놀랍니다. 시편기자처럼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주의 진리를 배우며 그대로 지키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을 통한 보상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의 크기는 현재의 고난의 크기에 비교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땅에서의 찌르는 고질적인 가시가 나를 약하게 만들어도 그 때 더 강해지는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가 다른 세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은 하늘기업의 상속자임을 주장해 현재의 고난을 이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