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심포니교회)
음악의 여러 가지 장르 중에 콘체르토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협주곡이라고 합니다. 이 협주곡은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고 한 명의 연주자가 오케스트라 앞에서 독주를 하는 것입니다. 즉 피아노 협주곡이라고 하면 피아노 한 사람이 독주를 하고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는 것입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하면 바이올린 한 사람이 독주를 하고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는 것이지요. 이 협주곡에서 중요한 것은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독주자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반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자신들의 연주 실력을 뽐내기 위해 독주자 보다 더 크게 연주를 한다고 하면 그 연주는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역할은 오직 독주자의 연주를 돋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연주가 되고 독주자와 함께 오케스트라도 찬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성도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고 자신은 죽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존귀해 질 수 있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는 낮추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만 나타내는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니라”(요3:30) 라고 말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례를 베풀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가 자기들이 기다리던 엘리야인가 하고 세례를 받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례를 베푸시니 세례요한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인 세례요한에게 말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그때 세례요한이 대답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니라”(요 3:27-30)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시대는 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오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흥하고 자기는 쇠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한 예수님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세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과 비교할 때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미천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자기의 위치와 예수님의 위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자기의 위치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 까요? 오늘 본문 27절에서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으면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어떤 능력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하늘로 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요한복음 1장 33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1:33)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오늘 본문 28절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 라고 자신을 정확하게 말하고 예수님을 자기가 증거하고 있는 메시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통령의 비서가 자기 위치를 모르면 자기가 대통령인 줄 알고 대통령의 권세를 휘두르다 낭패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천사가 자기의 위치를 모르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심판을 받고 쫓겨나 사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함부로 이용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없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의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신랑의 친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그 옆에서 신랑을 돕고 신랑을 빛나게 해 주는 신랑의 친구도 신랑만큼은 아니지만 친구의 결혼을 자신의 일같이 기뻐하는 자입니다. 세례요한은 그 신랑 친구의 기쁨을 자기도 누린다고 말합니다. 친구가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함께 행복해 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정말 친구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그런 친구를 찾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평생에 한두 명의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한 명의 진실한 친구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과연 있기나 한걸까요? 사람은 사람의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만큼 남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는 가까운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더 속상해 하고 힘들어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세례 요한이 말하는 신랑의 친구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기쁨, 우리 성도들 간에 그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이 나의 일 같이 기뻐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신부이기도 하지만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신랑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신랑의 친구로서 가졌던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인공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문제는 주인공이 아닌 자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서 시작됩니다. 세례요한이 그러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이면서 또한 주님의 신부를 주께로 인도하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흥하고 우리는 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흥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쇠한다는 무엇입니까? 흥한다는 것은 성장하고 증가하는 것을 말하고, 쇠한다는 것은 점점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흥함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흥함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흥하심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쇠하심을 통해 부활과 승천의 흥함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쇠함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의와 자랑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사는 것이 성도의 쇠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성도의 삶은 쇠하는 삶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쇠함을 통해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의 흥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흥하심의 절정은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구원의 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쇠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쇠함의 절정은,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가 드러나는 것이고, 주님이 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님의 날 주님이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살리셔서 우리도 또한 흥하게 해 주십니다. 성도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도의 자랑은 쇠하여 지는 것이고 죽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흥함을 소망하고 자신은 쇠하여지는 삶을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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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