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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9
선종욱 목사

(푸른초장교회)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기도의 대상을 먼저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하게 ‘아버지여’라고만 부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순서에 따라서 ‘아버지’, ‘우리’, ‘하늘’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관점에서 살피고 또 사람이 상식적으로 가져야 하는 생각 그리고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함께 살피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에는 대화의 상대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먼저 부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배우는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을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께 내가 기도하겠다는 표시입니다. ‘제가 기도하겠으니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은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두려운 하나님을 매우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을 향해 신성모독자라고 비난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이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미 구약 성경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만한 단서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시편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시편 89편 26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만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허락은 곧 아버지의 허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은총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믿음은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용기와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때 애간장이 녹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뻐하십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기도의 대상이신 아버지를 먼저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에 하나님께서 기뻐서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소리에 관심을 기울여 주십니다. 우리를 향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칠 때마다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한 사람의 아버지가 아닌 기도하는 사람들 곧 기도 공동체의 아버지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에게서 예수님의 기도 정신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 신앙을 가진 우리들에게도 역시 예수님의 기도 정신이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는 한 분이십니다. 신앙인들은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 독점되거나 예속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직책과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분들이 있다 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내가 아는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요,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만 참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오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해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의 비밀을 독점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밀을 독점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이단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비밀을 독점했다고 추앙받는 사람은 이단의 교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성을 갖습니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며 기도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서로를 인정합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를 사랑합니다. 비록 내가 보기에 탐탁지 않고 실수를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할 수 있음은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가족공동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책임을 갖습니다. 가족이며 공동체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책임감을 인정합니다.

셋째로, 한 분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하늘에’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무한성, 초월성, 그리고 사람을 완전하게 살피는 분임을 암시하십니다. 현재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리를 ‘메타 포지션(Meta Position)’이라고 합니다. 메타포지션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시간의 메타포지션, 공간의 메타포지션, 객관적 관조로 하나님은 우리 세계 안에 찾아오시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 밖에 계시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리는 우리의 위치에서 보면 ‘메타 포지션’입니다. 메타 포지션은 현실의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안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알고 계시는 초월자가 존재합니다. 시편 139편이라는 복음성가 첫머리에는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이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시편 139편의 내용 전체가 나를 잘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의 관점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여리고성의 여인 라합처럼 ‘상천하지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된 영성,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움직이는 지를 바르게 아는 세계관을 갖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배우며 깨닫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믿는 일을 우선합니다. 또 하늘에 계셔서 우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과 겸손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09.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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